축구 역사상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최초의 국제적인 스타였다. 푸슈카시는 축구 선수 외에도 군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부다페스트 혼베드를 국방부에서 인수하였기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그는 소령으로 임관했다. 이 때문에 푸슈카시는 질주하는 소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954년스위스에서 열린 FIFA 월드컵에서 헝가리의 준우승에 기여한 푸슈카시는, 이 대회 조별 리그에서 서독과의 경기 중 부상을 당해 결승 두 경기를 결장하게 되었고, 중심 선수를 잃은 헝가리는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연거푸 꺾고 결승전에 올랐으나, 조별 리그에서 이미 경기한 바 있었던 서독에게 3-2로 이기거나 지는 바람에 매직 마자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별명)의 불패 신화는 막을 내렸다.
이후 1956년헝가리에서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부다페스트 혼베드 팀의 선수로서 유러피언컵 출전을 위해 스페인으로 출국한 푸슈카시는 헝가리로 귀국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망명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헝가리 정부의 압력으로 2년간 공식 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처분이 끝난 1958년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였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의 첫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뒤에는 스페인 국적을 취득해 스페인 대표로도 뛰었으며, 레알 마드리드 소속 시절에는 프리메라리가 우승 6회, 유러피언컵 3회 우승에 일조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피치치 트로피(Pichichi Trophy)를 4번 수상하였으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통산 372경기에서 324골을 넣었다. 그 밖에 유러피언컵 1959-60 결승전에서 4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는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결승전 개인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66년 39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푸슈카시는 헝가리의 관점에서 복무 도중에 이탈한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헝가리에 입국할 수 없었고 그 후 세계 각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였으며 1971년에는 그리스의 파나시나이코스를 이끌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시키기도 하였다.
1981년헝가리에 다시 돌아온 푸슈카시는 고국에서 여전히 복무 도중에 이탈한 군인으로 취급을 받은 탓에 소시지 공장 등에서 인부로 일하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그 후 1989년에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야 헝가리로 다시 들어올 수 있었으며 헝가리 정부는 푸슈카시에 사면 및 복권 조치를 내렸다. 이 덕에 푸슈카시는 1993년헝가리 대표팀 감독을 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은퇴하였고, 그 후에 6년간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투병 생활을 했다.
2009년에는 국제 축구 연맹(FIFA)이 그의 이름을 딴 축구상인 FIFA 푸슈카시상을 신설했다. 이 상은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2019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그의 이름을 딴 푸슈카시 아레나가 개장했는데 이 경기장은 과거에 푸슈카시 페렌츠 슈터디온이 있던 자리에 새로 건립된 경기장이다.
그의 킥력은 세계가 알아줄 정도로 강력했다. 1954년 FIFA 월드컵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골키퍼로 출전한 바 있는 홍덕영에 의하면 "푸슈카시가 찬 공은 마치 대포알 같아서 선방하면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낄 정도였으며 크로스바에 맞으면 골대가 한참 동안이나 흔들렸다. 게다가 머리 옆으로 푸슈카시가 쏜 공이 날아갈 때 윙하고 거칠게 소리가 날 정도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