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혁명(헝가리어: 1956-os forradalom) 또는 헝가리 봉기는 헝가리 인민공화국(1949-1989년)과 헝가리 정부의 소련 종속정책에 반대한 전국적인 혁명이다. 헝가리 혁명은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의 전차부대에 진압되기 전까지 12일간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약 25만명의 헝가리인이 타국으로 망명했다.[3][4]
헝가리 혁명은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대학생들이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집결해 소련이 스탈린주의식 라코시 마차시 내각을 통해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시위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학생 대표단은 정치 및 경제개혁 요구를 담은 16개조 요구문을 시민사회에 알리기 위해 마자르 라디오 방송국 건물 진입을 시도했지만 경비원들에게 구금되었다. 라디오 방송국 건물 밖의 학생 시위대가 대표단의 석방을 요구하자 헝가리 국가보안국 소속 경찰이 총기를 발사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5]
이 결과 헝가리인은 혁명민병대를 조직해 국가보안국에 맞서 싸웠고, 헝가리 공산당 간부나 경찰들은 잡히면 즉결 처형되거나 린치를 당했으며,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무장하였다. 각 지역에서는 소비에트가 세워져 정치, 경제, 사회적 요구를 실현했으며 헝가리 노동인민당의 권력이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결국 너지 임레의 신내각은 국가보안국을 해체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 탈퇴를 선언했으며 자유선거를 재시행한다고 약속했다. 10월 말에는 격렬했던 전투가 진정되었다.
처음에는 헝가리 내 소련군 철수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1956년 11월 4일 소련은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11월 10일까지 헝가리인과 전투를 벌였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면서 헝가리인 2,500명과 소련군 700명이 사망했고 20만명이 넘는 헝가리인이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다.
혁명 과정
노동자·농민·국민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공포 정치에 반대해 도나우 강변의 바므 광장에서 반(反)정부집회를 열었다.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 헝가리 주재 소련군의 철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 16개 항목을 요구하며 억압적인 체제에 억눌려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시민들은 헝가리 국기에 동그란 구멍을 크게 뚫어 국기에 그려져 있던 국장을 떼어내고 건물 옥상 등에 걸려 있던 공산당의 상징인 붉은 별 등을 떼어내는 한편 도시 곳곳에 있던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는 등 반정부 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저널리스트인 오베르소프스키 쥘러(Obersovszky Gyula)도 다음날인 10월 24일 ‘이가샤그(Igazság, 진실)’라는 제목의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한층 고무시켰다. 그는 신문발행으로 나중에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총살에 실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 날 니키타 흐루쇼프소비에트 연방 수상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항의서한을 읽고는 카다르 야노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제1서기에게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살아났다.
정세는 시민의 개혁 요구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0월 24일 개혁파 인사 너지 임레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너지 임레는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폐지,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철수를 발표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코메콘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은 이 움직임을 ‘소련 간섭으로부터의 이탈’로 판단하고, 11월 4일 헝가리에 탱크 1,000대와 병사 15만 명을 투입해 너지 임레 정권을 힘으로 무너뜨렸다. 그 후 다시금 친소 정권이 세워지고 혁명군 지휘관이던 너지 임레와 팔 말레테르 등은 1958년부다페스트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
Györkei, Jenõ; Kirov, Alexandr; Horvath, Miklos (1999). 《소련군의 헝가리 개입, 1956》. 뉴욕: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350쪽. 63911636X.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UN General Assembly Special Committee on the Problem of Hungary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