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14년6월 15일러시아 제국의 스타브로폴고베르노라테에서 철도 공무원이었던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안드로포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리빈스크에서 지내게 되었고, 유리 안드로비치는 리빈스크의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1931년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했다. 이 시기에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비에트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1932년 리빈스크 기술대학교에 진학했으며, 1936년에 기술학 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 후 그는 1938년에는 야로슬라블 지역 공산당의 위원장이 되었고[1]1941년에는 콤소몰의 중앙위원장이 되었다.[2]
1941년에 독소전쟁이 일어나고, 유리 안드로포프는 핀란드 동부 지역의 반-나치 파르티잔으로서 핀란드의 좌익 계열의 파르티잔 세력과 합류하여 나치에 맞섰다. 1945년 독소전쟁이 끝나고, 1946년 핀란드와 소련 접경 부분에 있는 페트로자보스크 주립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역사학을 추가로 전공했다.
그 후 1953년 ~ 1975년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과 대사를 지냈으며, 1957년 ~ 1962년 당중앙위 연락부장을 거쳐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위 서기를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국가보안위원회 (KGB) 의장을 거쳐 정치국원이 되었고, 1976년 특급대장을 지냈다. 1982년 당 중앙 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소련 서기장 출신 중 유일하게 파르티잔 활동을 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에서 더욱더 관심을 보였다. 1983년6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국가 원수)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뒤를 이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