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에 캘리포니아로 여름 휴가를 갔을 때,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반유대주의 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유대인이었던 그는 타지에서 애매한 망명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어니스트 로런스가 월급으로 미화 300 달러를 받는 연구 보조직(이 직책은 한 원소를 발견한 과학자에게는 하위 직책인 편이다)을 그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체포되었을 때 로런스는 그 상황을 이용해 그의 월급을 미화 116 달러로 깎았다고 한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있는 동안 그는 아스타틴과 239Pu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44년 4월에는 239Pu를 이용해 폭탄을 만들었지만 240Pu 불순물 때문에 그것을 이용한 성공적인 폭탄은 일본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와 오언 체임벌린은 로런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 내의 연구 그룹의 공동 책임자였다. 그들이 맡은 연구 그룹은 반양성자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실험을 제안했고 이는 LRL에서 베바트론을 만들수 있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베바트론을 통해 그들의 그룹은 최초로 반양성자를 추출해 냈고 결국 1959년에 두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