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1907년 1월 23일, 도쿄부도쿄시아자부구 이치이베이초(현: 도쿄도미나토구롯폰기)에서 부친이자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옛성: 아사이)와 모친인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살 때 부친인 다쿠지(와카야마현 출신)의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것에 따라 가족 모두가 교토부교토시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아자부의 집에서는 출생 후 1년 2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1살 때부터 대학까지는 교토에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깐 동안 오사카나 니시노미야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생활했다(그러나 노벨상 수상의 대상이 됐던 중간자론을 발표한 것은 유카와가 오사카 제국대학에 근무했던 때였으며 당시에는 니시노미야의 구라쿠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왔던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2]
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와카야마 출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출생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
5, 6세 때 외할아버지인 고마키쓰에 의해서 한문 서적을 읽고 배웠다. 고마키쓰는 한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학문을 배워 말년까지 계속해서 런던 타임스를 구독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3] 이에 대해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이 때쯤에 한문 서적을 읽고 배운 것을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 의미도 모른 채 읽기 시작했던 한문 서적들이 나에게 큰 수확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후 어려운 책들을 읽을 때에 문자에 대한 저항감은 전혀 없었다. 한자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단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모르는 사이에 한자와 친숙해져 그 후 글을 읽기 쉬워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 유카와 히데키[4]
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에는 교토 부립 교토 제1 중학교(현: 교토 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権兵衛)였다.[5]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イワンちゃん)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바보 이반》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6]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6]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7]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8]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9]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 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는 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졌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본명은 스미코)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10]
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11] 알 수 없는 새로운 입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서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양자론 개척자인 닐스 보어는 1937년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자네는 그렇게 새로운 입자를 만들고 싶은 건가?”라고 유카와를 비판했다고 한다.[11]중일 전쟁 격화에 따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중간자와 비슷한 무게의 새로운 입자(‘뮤 입자’)가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진다는 ‘우주선’ 안에서 발견됐다고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발표함으로써 유카와의 중간자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11][주 1]
1938년 중성자의 존재에 대한 예측과 핵력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오사카 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2][13] 이러한 연구 업적은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됐다.
1939년, 유카와는 솔베이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14]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됐으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15]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 11월 3일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6]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16]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16][주 2] 또한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17]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1/3이나 2/3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후
1956년에 원자력 위원장인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위원이 됐다. ‘원자로를 외국에서 구입해 오더라도 5년째까지는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쇼리키의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거세게 반발, 하루 만에 그만두려고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이 만류해서 사임을 철회했다. 그 이후에도 쇼리키와의 대립은 깊어졌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 재임 1년 3개월 만에 사임했다.
1970년에 교토 대학을 정년 퇴임해 교토 대학 명예교수가 됐으며 말년에는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생명 현상에 있어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의 심취에 깊이 빠졌다. 휘호를 부탁받으면 자주 ‘지어락’(일본어: 知魚楽 치교라쿠[*], ちぎょらく)이라고 썼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라’(魚ノ楽シミヲ知ル)는 장자의 ‘추수’(秋水)의 마지막 한 구절이다.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 저택은 사후 40년이 지난 2021년 9월, 교토 대학에 기증했다. 대학은 이를 정비하면서 연구자나 방문객을 위한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상 〈와카바〉(若葉)의 대좌에는 유카와가 지은 단카인 “재앙의 불이여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마라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지 이곳은”(まがつびよ ふたたびここに くるなかれ 平和をいのる 人のみぞここは)[주 3]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1]
학술적 업적
강한 힘의 이론·중간자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힘, 약한 힘)[주 4] 가운데 강한 힘을 어떻게 정식화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당시로서는 문제가 됐고 여러 가지 시도가 이뤄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유카와는 전자의 200배의 질량을 갖는 중간자를 힘의 매개 입자(보스 입자)를 가정해서 핵력인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부터 페르미의 약한 힘을 이끌었다. 중간자론은 약한 힘, 강한 힘,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힘을 입자가 매개하는 것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을 정착시켰다.
단, 전자가 강한 힘을 전달한다는 생각을 하이젠베르크가 유카와 이전에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론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은 확립돼 있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나 보어는 관찰되지 않은 소립자로 장을 설명하는 유카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보어는 유카와에게, 하이젠베르크는 도모나가에게 이것을 알리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
인과율 파괴의 제기
초다시간이론과 비국소장 - 유카와의 원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유카와의 원(湯川の丸○)’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주 5]
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
《湯川秀樹日記 昭和九年:中間子論への道》 [유카와 히데키 일기 - 쇼와 9년: 중간자론으로의 길]. 아사히센쇼 836. 고누마 미치지. 아사히 신문 출판. 2007년 12월. ISBN978-4-02-259936-0.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고누마 미치지, 편집. (2020년 09월). 《湯川秀樹日記1945 京都で記した戦中戦後》 [유카와 히데키 일기 1945 - 교토에서 기록한 전중전후]. 교토 신문 출판 센터. ISBN978-4-7638-0734-2.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편집자 링크= (도움말);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내적 세계
《自己発見》 [자기 발견]. 현대 일본 에세이. 마이니치 신문사. 1972년.
《自己発見》 [자기 발견]. 고단샤 문고. 1979년 8월.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사와노 히사오 - 유카와의 자서전인 《나그네》의 협력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유카와 부부와 대립하였고, 1967년에 모델 소설로 알려진 《산꼭대기의 의자》를 집필하여 유카와를 곤란하게 하였다.
각주
주해
↑1936년 앤더슨과 그의 지도 학생인 세스 네더마이어는 전자의 207배 질량을 지니고 전자와 동일한 크기의 전하와 스핀 1/2을 가진 소립자(뮤 입자)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애초에 유카와가 ‘강한 상호작용의 이론’에서 제창한 중간자가 검출된 것이라고 생각돼 ‘뮤 중간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는 유카와가 제창한 새로운 입자(파이 중간자)와는 다른 입자였다.[11]
↑물리학자 사토 가쓰히코는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유럽과 미국의 과학자가 천혜의 환경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일본이라는 가난한 나라에 있어서 종이와 연필로 자신의 두뇌만으로 새로운 입자를 알아맞힌 유카와는 영웅이며 동경하는 존재였다고 밝혔다.[16]
↑유카와가 주장했던 인과율의 문제를 공간적인 것으로 제한해서 인과율을 회피하여 유카와의 생각을 되살린 것이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초다시간 이론이다. 이것에 의해 장의 양자론은 상대론적으로 공변한 형태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유카와는 이 문제를 비국소장으로서 취급했지만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카와 하루미의 회상기에 《유카와가에 살았던 아이와 어머니》(편저, 도리무샤, 2008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