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티나이코스 아틀리티코스 오밀로스(그리스어: Παναθηναϊκό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범(汎)아테네 체육 클럽")는 아테네를 연고로 하는 그리스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파나티나이코스는 "범(汎)아테네"로 해석이 된다.
1908년에 창단된 이 클럽은 수페르리가 엘라다에 속해 있으며 가장 오래되었으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 축구 클럽으로 손꼽힌다. 이 클럽은 그리스 리그를 20차례 그리스 컵을 20차례 그리스 슈퍼컵을 5차례 (비공식 2회 공식 3회) 우승했으며, 1번의 트레블과 8차례 더블을 달성했다. 그 외에도 범그리스 리그 (1927년 이전에 개최된 알파 에트니키의 전신)을 6번 SEGAS 컵을 2번 우승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유럽대항전 성과를 기준으로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 클럽이다. 파나티나이코스는 유럽피언컵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결승전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그리스 클럽이며 준결승전에도 1984-85 시즌과 1995-96 시즌에 두 차례 진출했었다. 또한 1971년에 인터콘티넨털컵에 참가했던 유일한 그리스 클럽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8강을 두 차례 더 (1991-92 시즌과 2001-02 시즌) 진출했고 UEFA컵 8강도 두 차례 (1987-88 시즌과 2002-03 시즌) 올랐다. 1977년 파나티나이코스는 발칸컵을 우승했다.
1908년, 우리는 "축구 클럽 아테네"의 창립을 결정했으며 [중략] 우리는 이 시대의 그리스 최고 축구 선수들이다.
”
— 요르고스 칼라파티스 (1958년)
공식 클럽 역사에 따르면, 파나티나이코스는 1909년 2월 3일, 요르고스 칼라파티스에 창단되었는데, 그는 파넬리니오스 김나스티코스 실로고스가 축구 부서의 해체를 결정하자 40명의 선수들이 클럽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정해 창단되게 되었다.[13] 클럽이 창단될 당시 명칭은 축구 클럽 아테네 (Ποδοσφαιρικός Όμιλος Αθηνών, ΠΟΑ)였다. 팀의 색상은 적색과 백색으로, 최초 홈구장은 파티시온 로에 있었다.[14]옥스퍼드 동문의 존 시릴 캠벨이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그는 그리스 클럽의 감독을 맡는 첫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14]
범그리스 축구 클럽
1910년, 보드진들간의 갈등 후, 칼라파티스는 캠벨 감독과 함께 다수의 선수들과 함께 축구 클럽 아테네를 떠나 아메리키스 광장에 새 구장을 마련했다. 이후, 클럽의 명칭은 범그리스 축구 클럽 (Πανελλήνιο Ποδοσφαιρικός Όμιλος, ΠΠΟ)으로 개명되었고, 색상이 녹색과 백색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캠벨은 잉글랜드로 귀향했으나, 클럽은 미할리스 파파조글루, 미할리스 로코스, 그리고 루카스 파누르야스와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였고, 이미 그리스 축구 최고의 클럽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1918년, 범그리스 축구 클럽은 미할리스 파파조글루의 제안에 따라 토끼풀을 로고로 쓰기 시작했다.[15] 1921년과 1922년 사이 아테네-피레아스 축구 클럽 협회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 두 차례의 리그를 개최했고, 두 차례 모두 범그리스 축구 클럽이 우승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클럽은 파티시온 로와 아메리키스 광장에 있는 구장들이 규모만큼 커지지 못했는데, 이는 다른 스포츠 부서의 확장으로 야기되었고, 페리볼라 지역의 알렉산드라스 가에서 새 구장을 건설할 공터를 물색했다.[15]아테네 시의회와의 긴 협상 끝에, 1922년, 클럽은 레오포로스 (Λεωφόρος, 그리스어로 "가"를 뜻함) 건설 허가를 받았다.[14]
범아테네 체육 클럽
영구적인 홈구장으로의 이전과 동시에 - 현재까지 이어지는 - 명칭인 범아테네 체육 클럽(Παναθηναϊκό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ΠΑΟ)으로 1924년 3월 15일에 구단 명칭이 개칭되었다.[14]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1922년에 내려졌다.
1931년,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와 메사리스간 2년동안 지속된 심각한 불화로 인해 비생산적인 시기로 이어졌다.[15] 같은 시기, 그리스 축구 협회가 그리스 컵을 1932년에 출범시켰다. 녹색 군단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거둔 영광의 순간은 1940년, 아리스를 3-1로 꺾고 컵대회 첫 우승을 거둔 때였다.
1979년, 그리스에 프로 축구가 도입되었다. 정유, 석유 시추, 언론,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재벌로 알려진 바르디노얀니스 가문은 범아테네 체육 클럽의 축구부를 인수했고, 요르고스 바르디노얀니스가 회장으로 취임했다.[15] 파나티나이코스는 1980년에 여자 축구 부서를 창단한 최초의 클럽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이 부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1991-92 시즌, 녹색 군단은 유러피언컵 8강에 진출해 유럽대항전 최초의 조별 리그에 참가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 1995–96 4강
1995-96 시즌, 후안 라몬 로차 감독의 지휘 하에 크시슈토프 바지하와 후안 호세 보레이와 같은 주요 선수들을 앞세워, 파나티나이코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까지 올라 아약스를 상대해 1차전에서 1-0 깜짝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차전에서 0-3의 참패를 당한 클럽은 결승전 재진출이 무산되었다. 이 해를 시작으로 클럽은 오랜 기간 동안 우승하지 못하였다.
21세기 초
2000년 여름, 요르고스 바르디노얀니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지분을 조카인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에게 내 주었고, 클럽 관리 방식이 바뀌었다. 얀니스 키라스타스가 팀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트자크 슘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후, 파나티나이코스는 2003-04 시즌에 10년만에 더블을 달성했다. 에세키엘 곤살레스, 루시안 슨머르테안, 그리고 마쿠스 뮌흐 등의 선수들이 2003년 여름 이적 시장에 영입되었다. 그러나, 슘 감독은 다음 시즌 초반에 뜻밖의 경질 통보를 받았다. 즈데네크 슈차스니가 그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05년, 팀 선수단에 큰 변화가 생겼다. 앙겔로스 바시나스나 미할리스 콘스탄티누와 같은 스타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플라비우 콘세이상과 이고르 비슈찬이 영입되었다. 슈차스니는 지휘봉을 알베르토 말레사니에게 넘겼다. 2006-07 시즌이 시작될 때, 말레사니가 클럽을 떠났고, 그의 자리는 한스 바케의 몫이 되었으나, 취임 3달 만에 클럽을 떠났다. 빅토르 무뇨스가 그 다음에 감독이 되었다. 2007-08 시즌, 파나티나이코스는 주제 페사이루를 감독으로 내정했다.
2008년 4월 22일, 대지주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는 기자 회견에서 가문의 €80M의 사 자본 가치 증가를 통해 지분을 50%로 줄일 것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디노얀니스 가문이 클럽을 완전 인수한지 30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지분액의 증가와 관한 협상에서, 바르디노얀니스 가문은 56%의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고, 아마추어 클럽이 10%, 나머지 34%를 소지주 (안드레아스 게노풀로스, 파블로스 얀나코풀로스, 아다만티오스 폴레미스, 그리고 니코스 파테라스와 같은 주 투자자들 위주) 가 갖게 되었다.
2008년의 대변혁 후, 파나티나이코스는 헹크 텐 카터를 감독으로 내정해 아스널의 지우베르투 시우바와 플루미넨시의 가브리에우와 같은 고액의 선수들을 영입했다. 2008-09 시즌, 녹색 군단은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을 달성하며, 아직 유럽 무대에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수페르리가 엘라다에서 정규 시즌에 3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으나, 플레이오프 미니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1년, 재정난으로 인해, 파나티나이코스는 예산 삭감을 목적으로 지브릴 시세를 €5.8M에 라치오로 매각했고, 주전 골키퍼알렉산드로스 초르바스를 팔레르모로 매각해야 했다.[21][22]퀸시 오우수-아베이, 투셰, 비톨로, 그리고 제카와 같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클럽의 회장 또한 변경되었는데, 디미트리스 곤티카스가 새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오덴세에게 합계 4-5로 패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본선행이 좌절되었다.
범아테네 연합의 출범
파나티나이코스는 2012년 3월 18일, 파나티나이코스-올림피아코스 더비전에서 훌리건의 격렬한 난동으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보드진 전체가 업무를 그만둠에 따라 파나티나이코스는 약 2달간 수뇌부가 없는 상태로 운영되었다.[23] 그러나, 얀니스 알라푸조스스카이 TV 회장은 바르디노얀니스의 지분 (54.7%) 을 인수해, 이를 그리스 내의 팬들에게 개방해 클럽 활동에 참가해, 파나티나이코스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24] 20명의 새 보드진들이 당선되고, 디미트리스 곤티카스가 회장으로 재선되면서 그의 계획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25] 팬들이 파나티나이코스의 도움 요청에 어떻게 응할지 주시해야만 했다.
2012년 7월 2일, 범아테네 연합이 대중에 개방되었고, 모두가 원한 만큼 공헌해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운영 몇주 후, 8,606명의 회원이 가맹했고, 일부 몇명은 전 파나티나이코스 선수들이었다. (붐송, 니니스, 지우베르투 시우바, 시세 등)
2012년 7월 18일은 파나티나이코스 역사에 남을 날이 되었는데,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가 그의 지분인 54.7%를 파나티나이코스의 범아테네 연합에게 넘겼고, 그에 따라 클럽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고, 팬들이 클럽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범아테네 연합의 첫 시즌은 대대적인 참사 외에는 없었다. 아직 재정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파나티나이코스는 리그를 6위로 마쳐 16년만에 처음으로 유럽대항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2013-14 시즌, 회원수가 9,305명으로 증가했고, 이들이 €2,580,836만큼 공헌했다.
시즌
회원 수
증가율
공헌
2012–13
8.606
-
€2.325.608
2013–14
9.305
8,12%
€2.580.836
2013-14 시즌의 시작과 함께 팬들과 기자들은 파나티나이코스가 성공적인 시즌을 보낼 전망을 비관적으로 내다보았고, 다수는 팀이 강등당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2013년 5월, 얀니스 아나스타시우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아나스타시우는 파나티나이코스 유소년팀을 거친 젊은 선수들과 경험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조화를 팀을 이루어 부흥하는 것을 계획으로 잡았다. 초기에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파나티나이코스 팬들은 팀이 어렵게 시작하는 가운데에도 지지했고, 클럽의 심각한 재정난과 젊고 검증되지 못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 치고는 대성공의 시즌을 보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정규 시즌을 4위로 마친 후, 플레이오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그에 따라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했다.) 마르쿠스 베리가 팀의 주 득점원으로써 동료들에게 힘이 되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PAOK전에서의 4-1 승리 후 그리스 컵을 우승했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파나티나이코스의 전통적 홈구장은 아테네암펠로키포이 구에 위치한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이었다. 이 경기장은 알렉산드라스 가에 위치해 있으며, 흔히 레오포로스 ("가"를 뜻한다) 로 지칭되고 있다. 이 경기장은 그리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구장으로 손꼽히며, 그리스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가장 최근에 사용된 것은 UEFA 유로 2004 예선전 때였다) 파나티나이코스와 라이벌 관계가 있는 AEK와 올림피아코스를 여러 차례 수용하기도 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1984년에 레오포로스를 떠나 새로 지어진 스피로스 루이스로 이전했다. 2000년, 앙겔로스 필리피디스 구단 회장은 €7M을 들여 리모델링이 완료된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으로의 재이전을 발표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은 25,000명에서 16,620명으로 축소되었고, 새 탈의실과 모듈식 지붕이 UEFA 표준 규정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졌으나, 2004년에 강화된 규정이 나와 UEFA 주관 경기를 유치하기 위해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의 확장이 다시 필요하게 되었다. 이 규정은 지역적인 문제가 수반되어, 팀은 새로 제안된 보타니코스 아레나가 지어질 때까지 스피로스 루이스로 또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기존의 레오포로스 구장은 철거되어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전설적인 13번 출입구 (Θυρα 13) 서포터 조직이 위치했던 서쪽의 구석 스탠드는 보존되어 파나티나이코스의 소규모 박물관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2007년 1월 27일, 파나티나이코스 보드진은 2007-08 시즌의 수페르리가 엘라다와 UEFA컵 홈경기에서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클럽 보드진은 잔디를 새로 깔고, 좌석을 교체하고, 기자회견실과 화장실 리모델링을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2013년 10월 기준, 클럽과 국내 재정 문제로, 보타니코스 아레나의 건설이 중단되었고, 그에 따라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의 철거 계획이 보류되었다. 스피로스 루이스를 홈구장으로 5년 더 사용한 후, 팀은 전통적인 홈구장에 다시 복귀했다.
파이아니아 훈련 구장은 그리스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스포츠 센터로, 1981년을 기점으로 파나티나이코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 클럽 아카데미가 재조직되었을때, 국내 최고의 클럽들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팀의 1군과 국가대표팀에 주요 선수들 (카라구니스, 바시나스, 키르기아코스, 니니스 등) 을 공급했다. 2013년, 클럽은 파이아니아에서 클럽이 운영하는 새 훈련 구장으로의 이전을 결정했다. 코로피에 위치한 게오르요스 칼라파티스 스포츠 센터는 파나티나이코스와 그 유소년 아카데미의 새 훈련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포터
최근 설문 조사에 따르면,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에서 2번째로 인기있는 구단으로 전체 인구의 30.2%가 클럽을 지지하고 있다.[26]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 전국, (아테네 수도권과 아티키 지역, 그리스 중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에피루스, 테살리, 에게해 군도, 마케도니아, 그리고 크레타 섬에 집중적으로) 키프로스, 그리고 그리스계 해외 거주민들 사이에 대규모 팬베이스를 두고 있다. 팬 설문 조사에 따르면 파나티나이코스의 주 라이벌로는 올림피아코스(36%)를 꼽고 있으며, AEK와 PAOK (각 13%) 도 라이벌 구단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파나티나이코스 서포터들은 그리스 축구 역사상 시즌권 최다 판매 기록 (2010년 31,091장) 과 한 시즌 최다 평균 관중 (1985-86 시즌 44,942명) 기록을 겸비하고 있다.
파나티나이코스의 주 서포터 조직은 13번 출입구 (Θυρα 13, 1966년 설립) 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와 키프로스를 통틀어 80개의 하위 서포터 클럽으로 조직되어 있다.[27] 13번 출입구의 응원 도구로는 녹색 홍염, 크고 작은 녹색 깃발, 배너중에서도 특해 화려하고 큰 동작이 수반된 것, 시끄럽고 지속적인 응원가 등이 있다. 13번 출입구은 시대를 걸쳐 클럽의 일부가 되어 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경우던지 간에 클럽의 결정을 따른다.
파나티나이코스의 현재 공식 응원가는 "위대한 클럽" (그리스어: Σύλλογος μεγάλος) 으로도 알려져 있다.[29] 응원가는 1958년에 처음 제작되었다. 작곡가는 요르고스 무자키스로, 당대 유명 음악가이자 트럼펫 연주자이며, 작사는 요르고스 오이코노미디스가 했다. 레안드로스 파파타나시우가 이 곡을 처음에 불렀고, 나중에 얀니스 보야치스도 응원가를 불렀다.
작사 / 작곡가에 따르면, 파나티나이코스가 경기에서 승리한 후에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에서 자리를 뜰때 이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오이코노미디스는 가사의 일부를 담배곽에 적었고, 이후 무자키스가 작곡했다.
역사적으로, 파나티나이코스의 초창기 응원가 작사는 코스타스 코피니오티스 (가사) 가 했고, 얀니스 벨라스 (음악) 가 작곡했다. 파노스 코키노스가 응원가를 노래했다.
원문
Σύλλογος μεγάλος δεν υπάρχει άλλος
δεν υπάρχει άλλος πιο δυναμικός
Και χιλιάδες φίλοι μόλις δουν τριφύλλι
ζήτω λένε ο Παναθηναϊκός!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μεγάλε και τρανέ.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πρωταθλητή σ' όλα τα σπορ παντοτινέ.
Σ' έχουνε δοξάσει οι γνωστοί σου άσοι
που λεβέντες είναι όλοι με καρδιά.
Χαίρεται η Ελλάδα που 'χει τέτοια ομάδα,
που της νίκης έχει πάντα τα κλειδιά.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μεγάλε και τρανέ.
Παναθηναϊκέ, Παναθηναϊκέ,
πρωταθλητή σ' όλα τα σπορ παντοτινέ.
발음
Sýllogos megálos den ypárchei állos
den ypárchei állos pio dynamikós
Kai chiliádes fíloi mólis doun trifylli
Zíto léne o Panathinaïkós!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megále kai trané.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protathlití s' óla ta stor pantotiné.
S' échoune doxásei oi grostoí sou ásoi
pou mebéntes eínai óloi me kardiá.
Chaíretai i Elláda pou 'chei tétoia omáda,
pou tis níkis échei pánta ta kleidiá.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megále kai trané.
Panathinaïké, Panathinaïké,
protathlití s' óla ta stor pantotiné.
해석
그 어느 클럽보다도 위대한 클럽
그 어느 클럽도 이보다 역동적일수 없네
그리고 수천명의 팬들이 토끼풀을 보자
그들은 외치네: 힘내라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크고 영광스럽네.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영원한 모든 종목의 챔피언.
당신의 유명 선수들로 영광을 얻었네
강인한 심장을 가진 강한 선수들로.
그리스는 이 팀을 가진 것에 자랑스러워 하네,
이기는 방법을 아는 팀을.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크고 영광스럽네.
파나티나이코스, 파나티나이코스,
영원한 모든 종목의 챔피언.
통계 및 기록
미미스 도마조스는 파나티나이코스의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1959년과 1980년 사이 502번의 1군 경기에 출전했다.[30] 스트라이커 크시슈토프 바지하가 그 바로 뒤인 2위를 기록하며, 390경기에 나왔다.[31]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진 골키퍼는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로 경기에 303번 출전했다.[32]
크시슈토프 바지하는 1989년부터 2004년까지의 모든 대회를 통틀어 288골을 기록해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로,[33] 1998년 1월에 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가 종전에 기록한 180골 기록을 경신했다.[34]
파나티나이코스가 기록한 최다 홈 관중은 74,493명으로, 1986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열린 AEK와의 그리스 리그 경기에서 기록했다.[35] 파나티나이코스가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에서 기록한 최다 관중 기록은 1967년, 29,665명이 관전한 파나티나이코스와 바이에른 뮌헨간의 컵위너스컵 경기에서 기록되었다.[36]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1부 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거둔 유일한 클럽이다. 팀은 이 업적을 1963-64 시즌에 달성했다.[37]
↑ 가나다라Kyriazis, Christos (2008년 2월 4일). “The Golden Age of PAO”. 《Ethnosport》 (그리스어) (Pegasus Publishing S.A.). 2008년 4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28일에 확인함.
↑Alexopoulos, Ilias (2008년 1월 3일). “Our best moments...” (그리스어). Athlitikι. 2009년 10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2월 17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