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친토 파케티(이탈리아어: Giacinto Facchetti; 1942년 7월 18일 ~ 2006년 9월 4일)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1960년부터 1978년까지 좌측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는 이후 2004년 1월부터 2006년에 영면에 들기 전까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공식 경기에 634번 출전해 75골을 기록했으며,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끄는 "위대한 인테르"(Grande Inter)의 주역으로 세리에 A를 4번, 코파 이탈리아를 1번, 유러피언컵을 2번, 그리고 인터콘티넨털컵을 2번 우승했다. 그는 1965년에 발롱도르 명단 2위에 이름을 올렸다.
파케티는 진정 위대한 공격형 측면 수비수로 회자된다. 그는 속도, 기술, 지능, 신체능력, 그리고 체력 면에서 좌측 수비수들 중 최고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반대 측면을 맡은 타르치시오 부르니치와 함께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이 빗장(Catenaccio) 전법으로 위협적인 수비진을 이루게 했다. 파케티는 현장에서의 능력 외에도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수 년 동안 겸임하며 절제력과 지도자 역량으로 찬사를 받았다.[2][3][4][5][6]
롬바르디아 주베르가모 도트레빌리오 출신인 파케티는 발이 빠르고, 공을 강하게 차며, 기술력도 출중했기에 고향 마리오 찬콘티에서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했다.[8] 트레빌리에세에서 활약하면서 엘레니오 에레라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 감독의 눈도장을 찍은 그는 공격적 역량 외에도 신체 조건, 활력, 그리고 저지 능력을 높게 보아 세리에 A로 1960-61 시즌에 좌측 공격형 수비수로 신고식을 치렀다. 그는 1961년 5월 21일, 2-0으로 이긴 로마와의 원정 경기에서 1부 리그 첫 경기를 치렀다.[4]
역할 변경은 성공적이었고, 파케티는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비수로 거듭났고, 동료 이탈리아인 측면 수비수 부르니치와 함께 수비벽을 단단히 했다. 파케티의 혁신적인 경기 방식과 견고한 수비와 공격 본능을 조합해 유럽의 1세대 전방 쇄도형 측면 수비수가 되었고, 수비적이면서 역습에 능한 에레라의 "위대한 인테르"(Grande Inter) 시대를 풍미한 빗장(catenaccio) 전법에 잘 녹아들어 1960년대 이탈리아, 유럽, 세계 축구계를 평정했다. 수비적으로 최소한의 득점만을 허용하면서, 파케티는 공격적으로 수 차례 득점과 도움을 기록했다.[3][5][6][9][10] 그는 세리에 A 수비수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도 세웠는데, 1965-66 시즌에 10골을 넣었지만, 이 기록은 마르코 마테라치가 2000-01 시즌에 갈아치웠다.[11]
파케티는 1963년 3월 23일, 1-0으로 이긴 튀르키예와의 유럽 네이션스컵 예선 원정 경기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당대 최다인 94번의 경기에 출전했고, 이후 이 기록을 디노 초프, 파올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잔루이지 부폰이 깼다. 94번의 경기 중 그는 70번의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찼고, 1963년부터 1977년까지 푸른 군단 소속으로 3골을 넣었다. 그는 현재 최다 출장 9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는 자국을 대표로 1966년, 1970년, 그리고 1974년 월드컵에 출전했고, 후자의 두 대회에서 주장을 맡았다. 파케티는 유로 1968을 우승할 당시에도 주장 완장을 찼고, 등번호 10번을 달았는데, 소련과의 준결승전 동전 던지기에서 선택이 적중에 결승전에 올라갔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결승전을 재경기 끝에 2-0으로 이겼다.[12] 또한 그는 대회의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970년 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의 결승행에 일조했지만, 브라질에 1-4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파케티는 이 대회에서도 대회의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3][9]
경기 방식
역대 최고의 측면 수비수로 꼽히는 파케티는 주력, 체력, 힘, 그리고 두드러지는 체격과 기술 역량을 이용해 공격적인 측면 수비수, 혹은 측면 중앙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 전에 공격수나 미드필더로도 뛰어본 적이 있는 그는 공격적으로 좌측면을 질주해 공격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해 강력하게 차넣거나 동료 앞으로 공을 배급하여 직접 득점하거나 동료의 득점을 돕기도 했고,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 득점 기회를 잡는 것은 당시 측면 수비수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2][3][4][11][13][14][15][16] 강인하고, 크고, 우아하며, 근면한 선수로, 공중 경합에 뛰어나며, 양 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며, 공 배급이나, 공을 다루는 데에도 준수했다. 그는 수비적으로도 소질이 뛰어나 공 배급력, 지능, 그리고 경기흐름을 읽거나, 공을 회수한 후 경기를 전개하는 능력은 물론 대인 방어, 위치 선정, 예측력, 그리고 상대 공격 저지 능력을 살려 말년에 주력이 떨어졌을 때 최후방 수비수로도 활약했다.[5][14][16][17] 유망주 시절부터 될성부를 떡잎이었던 그는 말년에 오랜 기간 독보적이었던 선수로도 남았다.[14] 축구적 역량 외에도, 그는 현장에서의 올곧은 성격과 지도자적 역량으로도 회자된다.[2][6][16] 그는 현역 시절에 단 한 번 퇴장당했는데, 당시 그는 심판을 비꼬았다.[5]
은퇴 후
은퇴 후, 파케티는 단장,[9][18] 이사진,[19] 국제 홍보대사, 그리고 부회장[19]을 비롯해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여러 직위를 맡았다. 파케티는 2004년 1월 19일에 마시모 모라티의 후임으로서 인테르나치오날레 회장으로 선임되었다.[18][20] 오랜 기간의 투병 끝에, 그는 2006년 9월 4일에 밀라노에서 췌장암으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유족으로 배우자 조반나와 4명의 자식을 남겼다.[5][9]
칼초폴리
칼초폴리(Calciopoli) 사건에 파케티의 역할은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인테르 회장을 역임하던 그는 스포츠 판결의 수혜자가 되었는데, 2011년 7월 스테파노 팔라치 FIGC 검찰의 말에 따르면 그의 스포츠 불법 행위로 강등 처분까지 내려질 수 있는 6조를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팔라치는 5년 전에 판결에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았으나, 파케티가 스포츠 정의 조례 6조를 위반한 것으로 보이며,[21][22] "비정상적 관계망 형성으로 불공평한 원칙을 바꾸고, 불공정성과 심판 체계의 독립성을 침해"를 위반해 팔라치 검사가 "인테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23][24]으로 판단케 했다는 나폴리에서의 범죄 행위 수사 중 발견한 사실을 바탕으로 칼초폴리 2탄(Calciopoli bis) 수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팔라치는 발언의 사실을 규명하기에 시효가 지나 불가능하다고 밝혔다.[25] 파케티의 행위는 여럿이 변호했는데,[26][27] 그 중 모라티는 "재판 없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지만, 인정할 수 없고, 인테르도 인정할 수 없다. ... 파케티가 연맹 검찰의 고소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명예훼손이며, 심각하고 멍청한 일이다."라고 비판했다.[28]
2010년, 루차노 모지는 파케티를 스포츠 불법 행위로 공개적으로 혐의를 제기했다. 2015년, 파케티의 아들 잔펠리체는 파케티 가를 대표하여 모지에 명예훼손 소송을 했다. 모지는 밀라노의 법원에서 파케티를 텔레비전 방송으로 명예 훼손한 혐의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29] 모지는 파케티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경기에 심판이 비호할 것을 요청했다"라고 혐의를 제기했다. 검사는 모지의 발언에 "진정 진실함"이 있었고 "로비 거래가 당시 인테르 회장과 심판진 간에 있었다 ..., 친밀적이며 특정적이며 공정치 못한 진행에 따라" 무죄로 소송을 종결지었다.[30] 판결은 2018년 항소에 채택되었고,[31] 2019년에 인용되었다.[32]
파케티가 2006년에 영면에 들면서, 그의 이름은 골든 풋 "축구 전설"에 이름이 올랐고, FIFA 회장상의 수상자로 이름이 올랐다. 그의 절제력과 현역 시절 활약에 힘입어 자친토 파케티 국제상(Premio internazionale Giacinto Facchetti)이 그를 기리기 위해 신설되었고, 현재까지 연간 정직함, 올곧은 성격, 그리고 스포츠인다운 모습을 보인 선수들에게 수상되었다.[33] 그가 영면에 든 후, 유소년 전국 리그의 명칭에 파케티의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들어가 TIM 유소년 전국 리그 - 자친토 파케티 트로피(Campionato Primavera Tim – Trofeo Giacinto Facchetti)가 되었다. 그의 친정 인테르나치오날레는 그를 기려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처리했다.[9]
↑Iaria, Marco (2011년 7월 14일). “Guido Rossi e quel comunicato estivo”. 《La Gazzetta dello Sport》 (이탈리아어). 2023년 1월 27일에 확인함. 팔라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인테르는 유일하게 반대한 구단으로 보이나, 이론적으로, 확실한 증거에 따라 스포츠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으나, 징계 의결 결과에 따라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Palazzi: 'Per l'Inter era illecito sportivo'”. 《Corriere dello Sport》 (이탈리아어). 2011년 7월 4일.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1월 30일에 확인함. 유벤투스의 2006년 우승을 박탈하고 정상에 오른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스포츠 정의 조례 6조를 위반했다. 이는 [FIGC의] 연맹 검사 스테파노 팔라치가 수사 결과 '새로 발견한 소식으로 수면에 떠오르자 유벤투스의 비판이 나왔다... 시효가 지난 후에 나온 사실이나, 무시할 수가 없다'라고 연맹 검찰의 보고와 연계해 내린 결과에 따른 판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