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武珍)은 한자어가 아니라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 한국어를 적은 것으로 진(珍)의 옛 한자 새김이 들, 돌인 것에서 무진(武珍)의 원래 발음은 무들, 물들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는 물+들(물이 많은 들판)일 것으로 보고 있다. 차자표기이기 때문에 무진(武珍)외에 무진(茂珍)이란 표기도 썼으며,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의 이름인 무등(無等)도 같은 말의 차자표기로 추정된다. 광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주영산포 일대를 이두로 수입이(水入伊: 물들이)라한 것으로 보아 옛날에 이 지역일대에 늪지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고 백제 시대에는 노지(奴只)라는 이름이 보이며,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6년에 무진주라고 하였다가, 경덕왕이 무진주에서 무(武)자를 취하여 무주로 개칭하였다. 현재 쓰이고 있는 광주(光州)란 이름은 고려 태조 시기에 등장한다.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에 따라 목(牧), 부(府), 현(縣), 군(郡) 등의 행정단위위계의 변동은 있었으나 명칭은 이어져 오게 된다.
부족시대:
광주지방에 부족 단위 사회가 발생한 시기는 마한 시대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魏誌東夷傳韓條)에 의하면 전라도 마한 지역 중 광주와 관련하여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 일대로 보고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전라도 나주의 반남ㆍ덕산ㆍ대안ㆍ신촌에 소재한 30여기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일대로 추정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ㆍ송암동ㆍ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광주가 속한 구사오단국은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한시대 각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상한년대는 지석묘 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 기원 전후가 되며 하한년대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 마한 잔여세력을 토벌하여 남해를 통해서 중원과 만난것으로 보아 4세기 초반이 된다. 따라서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4세기 후반까지 4ㆍ5백년간 지속된 것으로 본다.
백제는 고조선이 망한 후에 남하하여 온 유이민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점차 주변 부족국들을 통합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한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에서 일어난 삼국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다. 전남지역의 군현은 중ㆍ동ㆍ남ㆍ서ㆍ북 오방의 하나인 남장 구화하성(久和下城, 장성ㆍ구례의 二說)에 속하였는데 이 무렵의 광주지역은 무진주(武珍州)이며 직할 3현인 미동미리현(未冬夫里縣, 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한 거점이 된 武珍(광주), 發羅(나주), 月奈(영암)은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에서 武珍은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다.
남북국 시대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4년)의 일이며 이 때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한주에 중원경, 삭주에 북원경, 웅주에 서원경, 전주에 남원경의 5경을 두었고 이 당시 전남지역은 남원경에 속한 무주(武州)이며 15군 32현을 관할하였다.
광주가 무주(武州)라고 기록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경계 및 신라의 옛 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무진주조에 기록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미드형의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혜공왕 12년에는 경덕왕 때에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옛날처럼 복구되어 지방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신라후기에 무주ㆍ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고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아니면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 하다.
무주는 근처 3현인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일부), 기양현(창평)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시위부(侍衛府)와 9서당의 중앙군 이외에도 5州誓 및 삼변수(三邊守),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십정(十停)이 바로 지방군을 뜻하며 停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십정 중의 하나가 미다미리정(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현웅현(玄雄縣, 남평)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흑색금(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미다미리정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후삼국 시대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방수비장(防守婢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하고 부근 군현을 빼앗아 완산주(전주)에 진군하여 도읍을 삼고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했다.
그러나 북방의 궁예도 강원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효공왕 5년에 후고구려 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다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또 당시 궁예에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 및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 귀부시키고, 해상을 통해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나주) 등 10여군을 공략한후 나주에 진을 쳤다.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마진)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霸를 겨루었다.
고려 시대
고려 태조 19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며 태조 23년(940년)에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동시에 도독부를 두었다.
그 후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이 있었는데 전국을 3경ㆍ4도호부ㆍ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영암)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사사(刺史)를 두었다.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에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ㆍ승주에서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담양)ㆍ패주(보성), 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에 다시 행정구역을 재현하여 諸道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대 도호부ㆍ8목ㆍ56지주군사ㆍ28진장ㆍ20현령을 두었다.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이 되었다. 연대는 미상이나 그후 주로 승격되었다가 26대 충선왕 2년에 다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주에는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그 후 공민왕 11년에 다시 이름을 바꿔 무진부(茂珍府)라 했다.
전라도에는 좌도ㆍ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해 있었다. 세종 12년 마을 사람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였다는 죄과로 목을 강등하여 무진군이라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문종 원년에 다시 복칭되었다가 성종 20년 광산현으로 강등되고 연산군 7년에 복구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인조 숙종대에도 이와 유사하게 불미스러운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사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이 되던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에 따라 광주에 읍장을 두었는데, 그 당시의 광주는 성벽안을 성내면이라 했고 성외에 기례방ㆍ공수방ㆍ부동방의 3방이 있었기 때문에 1면 3방을 합병하여 광주면이라 호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광주읍으로 승격시켰다가 1935년에는 다시 府政을 실시 광주부로 고쳤다. 이때 행정구역은 41개 정으로 확장되었다.
대한민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자 주둔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되다 1947년 6월 3일부로 군정청이 폐지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광주부가 1949년 광주시로 바뀌면서 두 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이 이루어졌다. 1963년에는 서창ㆍ대촌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 관할 구역은 214.92km2로 좁아지고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되었다.
1966년에는 계림1구ㆍ월산동ㆍ효죽동의 3개동을 분동하여 48개 동으로 늘렸고, 1970년 다시 산수2동ㆍ서석2동ㆍ학3동 등 10개 동을 분동하여 모두 58개 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 인구는 52만 명이었다. 1973년 7월 1일부터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ㆍ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 구제(區制)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 석곡ㆍ지산 2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를 신설하여 3개구로 운영하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이때만 해도 3구 72동으로 행정구역 면적은 215.11km2에 불과했으나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 공포로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은 501.44km2로 크게 늘어나고 4구 83동 9출장소를 관할하는 서남권 중추관리기능도시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다.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남구가 분구되었고 2010년말 5개 자치구에 95개 행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광주는 UN지정 인권도시 추진을 통해 세계적인 민주ㆍ인권ㆍ평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적극 노력하고 있으며 2007년도에 광역시 중 세 번째로 수출 100억 불 도시를 달성한 이후 2014년에는 수출 162억 불을 달성하고 2015년도에는 165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등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2011년 11월까지 전국 최초로 4개 권역에 문화산업 투자진흥지구가 지정되고 2011년 1월에는 9개 지구에 광주연구개발(R&D) 특구가 지정되면서 미래성장동력 기반을 확충하였고 새로운 일자리 10만 개 창출과 자동차ㆍ광ㆍ가전ㆍ그린에너지ㆍ금형산업 등 5대 주력산업을 중점 육성하는 등 우리시의 소중한 자산이자 장점인 「민주ㆍ인권, 문화예술, 첨단산업」 3각축으로 한「더불어 사는 광주, 더불어 행복한 시민」도시 건설을 위해 광주가 새롭게 비상하고 있다.
광주는 동부 산악지와 서부 평야지대의 점이지대라고 할 수 있다. 광주의 지형은 노년기에 속하여 대체로 준평원화된 구릉성 지대라고 보면 된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의 산세를 보면 북쪽에 노령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전북과 불규칙한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소백산맥이 남북방향으로 뻗어 경남과 경계를 이루어 전라남도는 두 산맥의 울타리 사이에 자리한다. 광주평야는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지맥들 사이의 영산강 유역에 분포하며, 광주천과 그 소지류 및 극락강 유역에 연속되어 나타나고 있고 영산강 본류를 따라 인접한 나주 등지로 이어져 결국 나주평야의 일부를 형성한다.
기후
광주광역시의 기후 특성은 서해안형과 내륙형의 중간형으로 대체로 서해안형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겨울에는 몽골부근에서 그 세력을 우리나라쪽으로 확장하는 한랭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삼한사온의 날씨를 보이며, 여름에는 북태평양 동부에 중심을 두고 그 세력을 아시아쪽으로 확장하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무더우나 초여름과 늦여름에는 장마기가 있어 호우에 의한 기상재해가 발생하며, 태풍의 피해가 잦은 특징이 있다. 봄과 가을에는 중국에서 이동하는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건조하고 맑은 날이 많다. 2010년도 광주지방의 평균기온은 전년도와 유사한 14.2 °C이었으며 8월에는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28.1 °C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연중 강수총량은 1,573.1mm로 전년도보다 84.9mm가 많았으며 7월에는 2010년에 가장 많은 강수량인 453.0mm가 내렸다.[5]
동구는 전통적으로 광주의 중심지로, 구 전라남도청[11]과 구 광주시청[12]이 자리잡고 있다. 5.18 운동의 중심이 된 금남로와 충장로가 있으며 황금동, 대인동 등의 번화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구 전남도청과 전남도의회가 있던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북구 역시 광주의 중심지로 북구 중흥동에는 광주 교통의 중심지였던 광주역이 위치한다. 남구는 주월동, 봉선동 등의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구에는 상무 신시가지가 개발되었으며 현재 시청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산구는 원래 광산군 지역이었으며 광주송정역 주변의 송정동이 광산구의 주요 시가지이다. 광산구에는 첨단지구 및 신가지구, 신창지구, 운남지구, 하남1, 2, 3지구, 수완지구, 선운지구, 북구에는 첨단2지구가 완료되었으며 남구의 효천지구 등이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광산구에 광주과학기술원(GIST), 삼성전자 공장, 북구에 국립광주과학관, 서구 및 광산구에 기아의 공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광주는 산지와 평야의 2개 이질 지역 접촉지대에 발달한 군사·행정상 및 교역상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충장로·금남로 일대가 상업의 중심지이며 ‘교육도시’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학 및 각급 학교가 많아 전남 문화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광주에는 국립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조선대학교·광주대학교·호남대학교·광주교육대학교 등 8개의 4년제 대학교, 조선간호대학교 등을 포함한 8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초등학교 108개교, 중학교 69개교, 고등학교 58개교 등에 38만여 명이 재학하고 있다.
광주 서구 화정동에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있고, 산하에 동부ㆍ서부 2개의 교육지원청이 있다. 광주시에는 2010년 기준 유치원 248개, 초등학교 145개교, 중학교 85개교, 고등학교 72개교가 있다. 교육청 산하에는 도서관을 비롯하여 교육연수원, 교육과학연구원, 학생교육원, 교육정보원 등이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가 도시의 북부, 무안광주고속도로가 도시의 중부를 관통하며 북광주 나들목, 서광산 나들목, 운수 나들목, 북광산 나들목, 광산 나들목, 동림 나들목, 산월 분기점, 서광주 나들목, 용봉 나들목, 동광주 나들목, 문흥 분기점이 도시와 연결된다. 또한 도심을 순환하는 제1순환도로와, 도심 외부를 순환하는 도로인 제2순환도로가 있으며, 이 도로는 1구간 (문흥 분기점 ~ 장원 나들목), 2구간 (장원 나들목 ~ 효덕 나들목), 3구간 (효덕 나들목 ~ 서창 나들목), 4구간 (서창 나들목 ~ 산월 분기점)로 분류되어있다. 유료 구간은 2구간 (장원 나들목 ~ 지원 나들목), 3구간(효덕 나들목 ~ 풍암 나들목), 4구간 (서창 나들목 ~ 산월 분기점)이다. 그리고 2015년 12월 23일에 광주외곽순환고속도로(제3순환도로)가 착공되어 2022년 12월에 개통됐다. 또한,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은 한 때 동양 최대규모를 자랑하였던 버스 터미널로서, 2006년 8월경 '유스퀘어'라는 이름으로 새로 단장했다. 이 터미널에서는,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가 약 5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종합버스터미널이라서, 고속버스뿐만 아니라 시외버스 및 일부 농어촌버스 노선도 승차 가능하다.
자매도시간 상호원칙에 따라 2004년12월 29일에 상무지구에서 동림 나들목을 잇는 도시고속도로인 (개통 당시에는 일반도로였음) 센다이로가 개통되었으나, 광주 관문도로에 명명된 일본식 이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따라 지금은 빛고을대로로 변경되었다.
광주광역시의 버스는 광주광역시와 산하 구청에서 관리하고 각 운수 회사에서 운행하며, 2006년 12월 21일부터 준공영제와 무료환승제가 시행되고 있다.
10개 시내버스회사와 몇몇 공항·마을버스 회사가 광주광역시 전역과 인근 시군을 900여대의 버스로 운행하고 있으며, 인근 5개 시군의 7개 시내·마을버스 회사도 200여대의 버스로 광주광역시와 인근 시군간을 연결·운행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버스운행정보 시스템에서 버스의 배차 간격과 운행 시간, 환승 정보 및 도착 정보를 알 수 있다.
급행간선(좌석)버스는 5개 노선, 간선버스는 30개 노선, 지선버스는 60개 노선, 마을버스는 광산구에 4개 노선, 서구에 1개 노선이 운행 중이며, 이 외에도 공항버스 1개 노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