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삼국시대의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삼국지는 '사기', '한서'의 체계를 따라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무제(武帝, 조조), 명제(明帝, 조예) 등의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여 기술하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은 훗날 습착치의 《한진춘추》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배송지주
《삼국지주》(三國志注) 또는 《배송지주》(裴松之注)는 남북조시대송나라의 문제가 역사학자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으로 “배주”(裴注)라고도 하고 원문과 함께 칭할 때는 “수지배주”(壽志裴注)라고도 한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본래 주(注)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 자, 주(註)가 54만 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 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 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 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 자 주가 약 4만 2천 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 자 주가 약 6만 5천 자이다.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의 마지막 30권인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순서별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전(夫餘傳)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字)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1]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2]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1] 夫餘傳”. 국사편찬위원회. 2013년 1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19일에 확인함. 『三國志』夫餘傳은 총 930字이며, 中國正史 중 夫餘에 관한 최초의 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夫餘의 位置와 강역을 비롯하여 官制·衣食·儀禮·風俗·産物 등 夫餘의 生活習俗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玄菟郡·後漢·公孫氏 등 中國의 諸 勢力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撰者인 陳壽가 참고한『魏略』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과는 다른 異本이나, 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魏略』의 夫餘와 高句麗 공통의 習俗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全海宗,『東夷傳의 文獻的 硏究』pp.39~64) 이러한 점에서『三國志』夫餘傳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魏略』이 逸失된 현재『三國志』夫餘傳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42)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