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은 비록 한미했으나, 씩씩하고 절개가 있었으며,[2], 20세에 현의 공조가 되었다.[1]유비가 입촉할 무렵 현장 부인을 난리 중에서 보호한 일로 명성을 얻어 익주종사로 초빙되었다.[1]
건흥 5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한 사이 광한, 면죽에서 일어난 소란을 꾀를 내어 평정했다.[1] 이후 중병이 들자, 가난하였으므로 돈후하기로 명성이 높으나 면식이 없던 촉군태수 하지를 찾아갔고, 하지는 사재를 털어 장억을 치료했다.[1]
남만 평정
아문장군에 배령되었고, 마충에 속해 문산군의 강족과 남쪽 4군의 남만을 평정하는 데 계획을 세워 승리에 공헌했다.[1]
월수군은 제갈량의 남정 후 수이(叟夷, 수는 촉의 별칭이며, 본디 촉 땅에 살던 비한족)가 자주 모반하여 태수 공록과 초황을 살해하니(단, 이는 《삼국지》 권45 등장종양전에 수록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 진수 자신이 단 주석 "공록은 건흥(建興) 3년(225)에 월수태수(越嶲太守)로 임명되었고, 승상 제갈량을 수행하여 남쪽으로 정벌하러 갔다가 만족(蠻夷)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당시 31세였다."라는 기록과 배치되고 초황이 고정의 반란 당시 살해당했다는 화양국지의 기록과도 대치된다. 이 때문에 자치통감에선 해당 기록에 그냥 이민족의 반란이 자주 있었다고만 기록했다.[3][4][5][6]) 후임 태수는 감히 군에 부임하지 못했다.[1] 시론은 월수군을 회복하기를 원했으므로, 연희 2년(239년), 장억을 월수태수로 임명했다.[1] 장억은 은혜와 신의를 보여 여러 비한족들을 복종케 했으며, 북쪽의 착마(捉馬)가 명령을 따르지 않자 이를 쳐 그 우두머리 위랑(魏狼)을 사로잡고 회유하여 위랑을 읍후로 삼았다.[1] 이후 여러 비한족들이 복종하였고, 그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1]
이미 항복한 소기읍의 군장 동봉(冬逢)과 그 아우 외거(隗渠) 등이 반기를 들자, 동봉을 죽이되 그 아내는 모우왕의 딸이므로 계책상 살려줬다.[1] 외거는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용맹하여 다른 족속에게 두렵고 꺼림의 대상이었다.[1] 그는 친속 2명을 장억에게 거짓 항복시켜 소식을 듣고자 했는데, 장억은 이들을 회유시켜 거꾸로 외거를 죽이게 했다.[1] 또 공록을 죽인 이구승을 주살했다.[1] 장억이 월수태수로 재임한 지 3년, 본군으로 돌아와 성벽을 쌓으니 비한족들은 감히 일을 않으려 하지 않았다.[1]
정작, 대등, 비수 세 현의 비한족들이 특산물을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었는데, 장억은 이를 탈취하려 했다.[1] 정작의 우두머리로 비한족들의 신임을 받는 낭잠이 장억에게 저항하자, 장억은 낭잠을 매질하여 죽이고 시체를 그 취락으로 돌려보내어 협박하는 한편 이들이 굴복하자 연회를 열어 은위를 함께 떨쳐, 마침내 세 현의 특산물을 얻었다.[1]
월수군과 한가군의 경계에 모우이 4천여 호가 살고 있었는데, 그 왕 낭로(狼路)는 동봉이 죽었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어 숙부 낭리에게 염탐하게 했다.[1] 장억은 낭리를 회유하는 한편 죽이지 않은 동봉의 아내를 낭리에게 보내니, 낭리는 누나와 서로 만나 기뻐하였고 모우이는 다시 반란하지 않았다.[1] 그리고 재물을 주고 낭로의 고모를 통해 계속 회유하여 결국 낭로를 귀순시켰다.[1] 이로써 장억은 모우이령을 지나는 평탄한 옛 도로를 회복했다(모우이가 길을 끊은 지 100년간은 안상현을 지나는 험로를 썼다).[1] 또 낭로를 표를 올려 모우구비왕으로 임명하게 하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1] 이로써 무융장군에 임명되었고, 월수태수를 계속 겸임했다.[1]
15년간 태수직을 수행하다 성도로 돌아갔으며, 탕구장군이 되었다.[1]연희 17년(254년), 위나라의 적도장(적도현의 현장) 이간이 항복하자 강유의 지휘를 받으며 농서로 출병했다.[1]
이때 장억은 중병에 빠져 걷기도 어려웠으나, 조정에서 이간의 항복을 의심스러워하자 이간의 항복은 참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런 몸 상태에서도 끝내 우겨 출병했다.[2] 적도현에 이르러 이간의 항복을 받았고, 나아가 위나라의 정촉호군 서질과 싸워 전사했으나, 적에게는 배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1] 맏아들 영을 서향후에 봉했고, 둘째 아들 호웅에게 관내후를 습작시켰다.[1]
월수군의 한족과 비한족들은 모두 장억의 전사를 슬퍼하여, 장억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1]
일화
건흥 14년(236년), 무도군의 저족 왕 부건이 항복을 청했는데, 약속한 때를 넘겼는데도 오지 않았다.[1] 대장군 장완이 이를 걱정하자, 장억은 부건의 항복 자체는 믿을 만하지만 부건의 아우가 항복 반대파와 함께 내분을 일으킨 것이라고 추측했다.[1] 나중에 결국 부건의 아우가 4백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가버렸고, 부건만이 투항하러 온다고 했다.[1](단, 《삼국지》 후주전에서는 이때 부건과 4백여 호를 촉군 광도현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4]
비의가 대장군이 되어서 투항한 자들을 지나치게 대우하자, 장억은 비의에게 이를 경계하는 편지를 보냈다.[1] 비의는 결국 위나라에서 투항한 곽수에게 살해당했다.[1]
건흥 원년(252년) 12월, 동오의 태부 제갈각이 쳐들어온 위군을 박살내고 교만해져 이듬해에는 20만 명을 일으켜 대대적으로 위나라를 침공하자,[7][8] 제갈각의 종제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내 제갈각이 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군사를 내지 말기를 권하도록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1] 제갈각은 그해 10월에 암살당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