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楊俊, ? ~ 222년)은 중국 후한 말기 ~ 조위의 관료로, 자는 계재(季才)이며 하내군 획가현(獲嘉縣) 사람이다.[1] 문제와 조식의 후계 분쟁에서 조식 편에 서, 문제에게 원죄를 쓰고 죽었다.
행적
어려서는 변양(邊讓)을 사사하여, 변양에게 그 기량을 인정받았다.[1]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가 교통의 요충지이므로 반드시 전장이 되리라고 여겨 노약자를 부축하고 100여 가와 함께 낙양(洛陽) · 밀현의 산간 지대로 이주했다.[1]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종족 중에 노예로 전락한 여섯 집안을 속했다.[1] 이후 다시 병주(幷州)로 피란했다.[1]
별부사마(別部司馬) · 영병주자사(領幷州刺史) 양습이 주 안의 명사들을 추천하면서 양준도 추천되었고,[1] 조조(曹操)는 양준을 곡량장으로 삼았다가 다시 승상연속(丞相掾屬)으로 삼고, 무재(茂才)로 천거하여 안릉령(安陵令)으로 삼았으며 이후 남양태수(南陽太守)에 임명하였다.[1] 재직 중에 덕과 교화를 선양하고, 학교를 지어 관민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1] 정남군사(征南軍師)로 옮겼다.[1] 조조가 위공(魏公)이 되어 후한의 제후국으로서의 위나라를 세운 후, 양준은 중위(中尉)가 되었다.[1] 건안(建安) 24년(219년), 위풍(魏諷)이 조조가 한중(漢中)으로 출진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조조가 있는 곳으로 가 스스로 탄핵하고, 태자 조비(曹丕)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결국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좌천되는 것으로 끝났다.[1] 양준은 임치후(臨菑侯) 조식(曹植)과 사이가 좋았으며, 조조가 후계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사로이 의견을 묻자 비록 조비와 조식 둘 중 어느 쪽이 낫다고 하지는 않았으나 조식을 칭송하였고,[1] 조비는 항상 이를 한스러워하였다.[1]
조비가 황제가 되고서 남양태수로 복직했으며, 산기상시(散騎常侍) 왕상(王象)이 양준을 천거했다.[1] 황초(黃初) 3년(222년), 문제가 어가를 타고 완(宛)[2]에 이르렀는데, 시장이 모두 문을 닫은 것을 보고 분노하여 양준을 잡아들였다.[1] 산기상시 사마의 · 상시(常侍) 왕상 · 순위(荀緯)가 피를 흘리도록 머리를 땅에 찧으며 양준을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문제는 듣지 않았고, 양준은 “나는 죄를 압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1] 사람들은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1]
인물 평가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무렵 16, 7세 정도의 사마의를 만나보고 비상한 인물이라고 평했다.[1] 또 사마랑(司馬朗)의 족형 사마지(司馬芝)의 평판이 높지 않았으나, 양준만은 실질에서는 사마지가 사마랑보다 낫다고 평했다.[1]
한편 고향 군의 왕상이 노예가 되어 고초를 받으면서도 학문에 힘썼는데, 양준은 왕상의 재질을 알아보고 왕상을 속하여 혼인하고 집을 세워준 후에 헤어졌다.[1] 양준은 젊어서부터 다른 사람을 품평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1] 같은 군 사람 심고(審固), 진류 사람 위순(衛恂)은 본디 병사 출신이었는데, 양준은 이들의 자질을 보고 발탁하여 훌륭한 선비로 만들었다.[1] 심고는 군의 태수(太守)를 역임했고, 위순은 어사(御史)와 현령(縣令)을 역임했다.[1]
친척 관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