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홍의 본관은 함양 여씨(咸陽)이다. 호는 근농(勤農). 치계(稚溪) 여우길(呂祐吉)의 11대손. 1891년9월 1일경기도양평 양서면 신원리 묘꼴의 유복한 집안(아버지: 여정현(呂鼎鉉), 어머니: 이항복의 11대손녀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태어났다. 형은 여운형이다. 위로 형 셋이 있었으나 형 세명은 모두 어려서 요절했고[2], 여운형과 여운홍과 누이 2명만 살아남았다.
학비를 마련해야 했던 여운홍은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시카고 주 레이크폴리스트에는 백만장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때 여운홍은 이곳에서 새벽4시에 일어나 부잣집의 보일러 화구에 석탄을 넣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보일러채난 아르바이트가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1918년6월오하이오주의 우스터 대학을 졸업했다. 우스터 대학을 졸업한 여운홍은 프린스턴 대학교신학원으로 진학한다. 프린스턴 대학교신학원에서는 희랍어를 주로 배웠으나, 그해 11월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독립운동
파리강화회의 참가
1917년미국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한때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던 그를 만나고자 소개장을 얻어 찾아가려 했다. 대학 교수와 목사 몇인의 소개장을 들고 1917년 11월 15일 백악관을 찾았으나 영어가 서투르던 그는 한참만에 경호실을 통과하여 백악관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윌슨의 비서 그라스의 면담거절로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유학시절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약소민족의 비애를 호소했고, 1918년 11월 말 프린스턴에서의 짐을 정리하고 프린스턴 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게 된다.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여비보조를 요청하였으나 안창호는 "일의 성불성은 여하간 그대의 애국심과 열성에 감동한다. 여비는 걱정말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여권을 얻어보라"며 격려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으로부터 국무장관 폴크를 통해 한국에서 일종의 봉기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한 파리 회의에 한국 안건을 상정하기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미국에 체류한 여운홍과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샤록스에게 '적당한 시기에 외교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민중 운동을 국내에서 전개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평소 국내에서 자신을 지지해 주던 송진우, 김성수, 함태영, 양전백 등에게 전달토록했다.[4]
1918년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할 때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6월에는 김규식, 김탕 등과 함께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프랑스에 다녀왔다.[5] 그러나 열강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위원부의 노력을 묵살하자 실망한 그는 김규식을 따라 1919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간다.
1920년상하이의 한국인 학교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부임하여 학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기금을 모금활동을 하였다. 상하이 인성학교는 광복 이후에도 상해 재중국 동포 학교로 존재하다가 학생수 감소로 1980년에 폐교되었다.[6][7][8] 이 동안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9][10]1920년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이승만이 쑨원에게 보내는 비밀서한을 광저우에 가져가 전하라는 밀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임정은 이때 남방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1] 그 해 9월 상하이 조선인거류민단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6월에는 국민대표회기성회 제1회 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사회 활동
1921년 9월 귀국했다가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재무 간사를 맡았다. 1922년∼1925년에 보성전문학교영문학교수를 지내는 등 영문학자로 활동했다. 그 후 싱거미신회사에 입사하여 1927년∼1939년에 싱거미신회사 총감독을 지냈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전향요구가 계속되었고, 여운홍은 일본을 피해 공식 활동을 중단하였다.
일제 말기 1941년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부일협력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 그 해 12월 이광수, 김동환 등과 함께 시국강연에 1차례 나섰으며, 이 시국강연에서 연설한 내용이 잡지 삼천리에 1942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어 1942년 2월호 조광에 내선일체 지지하는 내용의 논문등을 기고했다. 그 해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좌담회에 참석했다.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경성부 종로지역의 지원병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 이광수, 조병상, 한상룡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뒤 고향 경기도 양평에 내려가 1945년 광복때까지 칩거생활을 하며 지냈다.
1941년 이후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다가 일본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정치 활동
해방 직후
1945년8월 15일 광복 후에는 친형 여운형, 안재홍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일선에 나섰다. 8월 15일 아침 형 여운형이 정무총감으로부터 부총독(정무총감)은 미군이 코리아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며, 점령은 순전히 소련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12]
여기에 자극받은 여운형은 엔도 총감과의 회동 직후 계동집에 돌아왔다. 여운홍은 간밤에 자기에게 접수하라 했던 방송국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하였다.[12] 그러나 9월 남한에 상륙한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미국군이었다.
1946년5월 11일에는 인민당 중앙집행위원 장권 등 10여명의 간부를 포함한 94명이 조선인민당을 탈당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 이후 여운홍이 창당하게 될 사회민주당은 조선인민당이탈자들이 중심을 이룬 중도파 정당이었다.[17] 그의 인민당 탈당 배경에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좌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정의 계략이었다.[18]박헌영 계열에서 조봉암이 빠지고, 여운형 계열에서는 그가 탈당하면서 좌파 진영의 세력을 축소, 약화되어갔다.
좌우합작 참여와 과도입법위원
1946년5월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고, 중도 좌파 노선을 지지하였으며, 8월 3일사민당 결성식에는 이승만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19] 그가 형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을 탈당하게 된 배경에 대해 소련측에서는 존 하지가 여운홍에게 대통령 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기록하였다.[20] 이후 민보사 사장 등을 지냈고,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 격문 등을 기초하는 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 홍명희, 엄항섭등과 함께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23]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단독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이에 격분하여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23] 그러자 박헌영은 왈거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23]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자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하였다.[23] 이후 남북협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48년5월 귀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
1950년5월 30일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고[24],
1954년 제3대 총선거에 서울시종로구 을구에서 출마하였으나 5,450표로 낙선하였다. 그밖에 자유당 선전부장을 지내고 1960년 제5대 총선거에서는 참의원 의원에 당선(최고득점)되었다. 제2공화국때 남북협상론으로 총리 장면의 공격을 받았다.[25]
제2공화국 시절
1960년5월의 제5대 참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등원하였다. 이후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1년1월 10일 평화통일과 남·북한 인사교류의 첫단계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전직 북한의 국가수반)인 김두봉(金枓奉)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내각 부총리 홍명희 등을 남한에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6][27]1월 16일장택상은 국시위반이 아니냐고 되물었다.[28]국무총리장면(張勉)은 북한의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전직 북한의 국가수반)인 김두봉(金枓奉)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내각 부총리 홍명희 등을 남한에 초청하자는 참의원의원 여운홍의 주장은 정치인의 의견이라면 모르나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면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하였다.[29]
1961년일본을 방문하였다. 여운홍은 도쿄에 갔을 때 엔도를 만나 해방 당시 왜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한다고 했는가를 물어보았더니 “도쿄 내무성에서 온 전보에 조선이 분단점령된다고 해서 그랬다고 대답하였다.[12]
63년 12월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여운홍은 박정희를 찾아 면담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불가능하자 관계당국에 진정서를 내는 대신 박정희를 찾아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직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의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31]
만년
형 여운형의 일대기를 정리한 몽양 여운형을 간행하였다. 1968년여운형추모회를 설립하고 윤보선, 박정희 등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1970년대 이후 북한에 특파기자가 파견되자, 그는 북녘에 있는 조카들을 만나보기 위해 자신이 자청해서 특파기자가 되겠다고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2년2월경향신문에 '내가 겪은 20세기'를 기사 연재하였다.
1973년2월 3일 상오 9시45분 노환으로 서울 종로구 계동140-8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경기도양평군양서면 신원리 생가 근처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형인 여운형의 평전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1967), 《영문법》이 있다.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여운형에게는 '박헌영계열의 공산주의자와 연계한것은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35]내무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尹致暎)의 중앙학교 동문이었다.
여운형과 여운홍은 국어학자 박승빈을 사표로 받들었는데[34], 후일 박승빈의 아들 박정서(朴定緖)는 그의 여동생 여윤숙(呂允淑)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