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논설을 발표하고 일제침략전쟁을 정당화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705인 명단에 포함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제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청년운동가이자 교육자, 상담로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가 되고, 이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에 동참하였으며, 3.1 운동과 청구구락부, 수양동우회 등에 가담하고, 흥업구락부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1941년대화숙 보호관찰 처분을 계기로 전향, 친일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그는 YMCA 기독교청년회 재건에 참여하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선출되고, 그해 9월 2일한국민주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광복 직후와 미군정 치하에서 경기도지사를 맡아 보았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1949년1월 13일 정부로부터 다시 경기도지사로 임명, 발령되었다.[1]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경기도광주군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지는 한성부 중부 청진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필운동에서 생활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신자로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인 유명 인사였다. 출생년대가 정확하지 않아 1889년생 설, 1890년생 설이 있고, 생일도 3월 30일설 외에 3월 20일생 설이 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이성계의 부장이었던 도원수 구성로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 때의 공신, 재상 겸 정치가였던 구치관의 19대손이 된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세종대왕의 아들 임영대군의 사위 구수영(具壽永), 연산군의 사위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호양공 구문경과, 재상 구사맹, 원종의 처이자 인조, 능원대군 보의 어머니 인헌왕후 등이 있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경기도고양에 살았고, 고양군 벽제면 효자리에 그의 선대 묘역이 있다.
친형은 구자록과 창문사의 대표 구자혁이 있는데, 이 중 구자혁은 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된다. 구자혁의 본처 상산 김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화가 구본웅으로 구본웅은 이상과 가까웠는데, 구자혁의 재취 부인인 변동숙의 이복 여동생 변동림이 화가 이상의 처였다.
어려서 한성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성관립영어학교 재학 중 그는 감리교 신자가 되고, 1910년 이후 YMCA 중앙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였다. 1909년(융희 3년) 3월 한성관립영어학교 졸업 후 감리교협성신학교(監理敎協成神學校)로 진학했다. 그러나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이곳 또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한때 임시토지조사국기술원양성소(臨時土地調査局技術員養成所)의 측량과에 입소하여 수료하였다. 그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靑山學院 神學部)에 입학했으나 역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독립 운동과 사회 운동
독립 운동과 기독교 신앙단체 활동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사교부 간사가 되었다.1919년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 중앙학교 학감(學監)을 지냈으며, 그뒤 경성기독교청년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여하고 바로 경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선출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연합회 사교부 간사 등을 역임하며 기독교청년운동에 힘썼다.
1922년3월경성기독교청년회 부총무에 선출되었다. 그해 12월안창남 비행사 후원회에 참여하고 후원회 대표에 선임되어, 안창남 귀국 환영회와 후원활동을 주관하였다. 1923년6월에는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호놀룰루에 도착, 그해 6월 ~ 7월 하와이 한인교민회 학생들의 모국 방문단의 하와이 출발과 입국, 출국 과정에 참여하고 인솔하였다.
1925년3월 23일 그는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가했다. 흥업구락부는 경성부와 경기도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인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이갑성, 유억겸 등이 이승만 노선에 따라 조직한 것으로[5] 그밖에도 박동완, 안재홍 등도 참여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감리교 교회를 중심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1927년 일찍 사망한 이상재를 제외하고는 광복 전 다양한 시기에 변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24년 12월 15일 귀국한 신흥우가 서웅 중앙YMCA기독교청년회에서 단체 조직을 계획하고 이후 단체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1월수양동우회의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감리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매각될 위기에 처한 이순신 장군 위토 보존 모금운동과 브나로드 운동, 농촌 계몽 활동 등에 참여하였다.
투옥과 재판
1930년대 다시 도미하여 시카고YMCA청년회전문학교(시카고基督敎靑年會專門學校)에서 6개월간 영어 과정을 이수한 뒤 메사추세스 기독교청년회에서 다년간 연구하고, 신학석사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간사, 중앙학교 학감 등을 맡았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의 요청에 의해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활동자금 및 군자금을 성금 모금하여 수만 원을 거두어들여 미국과 상하이 등으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7][8] 이후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 청구구락부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등 각각의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8년1월까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3차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고, 8월 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무죄 처분받았다. 5월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5월 22일흥업구락부 관련 혐의로 안재홍 흥업구락부 간부 회원 60여 명 등 100여 명과 함께 기소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경성고등법원에 추가 기소되었다. 총독부 경무국은 구자옥을 비롯한 52명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기소하였다. 1938년9월 우선 신흥우, 정춘수, 유억겸 등 몇명과 함께 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러나 재판은 계속되었다. 1941년 증거 불충분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무죄 처분받고 가석방되었다.
1940년창씨개명 때는 그해 말 구쓰이에 치다마로 창씨개명하였다.[13]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나 각종 친일 관변단체 주관 각종 행사에 불출석, 회피하거나 병을 이유로 불참하였고, 해방 직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친일본인 인사를 파악할 때 친일본 인사로는 지목되지 않았다. 이후 한때 신앙 활동차 도미 순방을 하기도 했고, 그밖에 경성부 영창중학교(英彰中學校) 교장 등을 역임했다.
경기도지사 재임 중이던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이끌려 월북했다.[18] 전쟁 초기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종로구 광화문 경기도청사에서 머무르다가 조선인민군 정치보위부원 4~5명에 의해 피랍되었다. 번역서인 《현대 성경해석》(1934) 등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가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북송되었으며, 납치된 아버지를 만나서 수행했던 아들 구본준은 중도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1950년11월 북행길 도중 강계 부근에서 사망했다는 증언이 있다.
사후
그의 묘소와 가묘는 모두 미상이다. 6.25 전쟁 당시 탈출에 성공한 그의 아들 구본준은 이승만 정부의 경무대에 입사하여 근무하고 경무대 대변인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