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2월 4일강원도강릉시사천면 노동리 71번지에서 아버지 김제옥과 어머니 신석우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1908년함경남도원산으로 이주하였고 1913년 다시 함경남도흥남으로 이주하였다. 1918년 함경남도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함경남도흥남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함경남도 흥남 지역에서 3·1 운동 참가를 한 뒤 1922년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으며 1925년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 전문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1922년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샤를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편을 가지고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 1936년 47편을 묶어 두 번째 시집《파초》를 간행하였다. 일제에 항거하여 1942년 《술노래》를 끝으로 해방될때까지 붓을 꺾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민족시인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1947년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거의 시풍과 서정성에서 벗어나 현실과 정치, 사회적인 풍자와 관념에 관한 글을 집필하였다. 1947년 세 번째 시집 《하늘》을 발간 후 1948년2월 13일을 기하여 이름을 김동명(金東鳴)에서 김동오(金東嗚)로 개명하였으나 여전히 김동명(金東鳴)이라는 개명 이전 이름을 작가로써 필명화하였다. 1955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55년 《적과 동지》라는 평론을 주로 《동아일보》를 통하여 연재, 예리한 정치 평론을 하였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 군사정변 전까지 정치 생활을 하였다. 그 후 1968년1월 21일, 3년간 지병으로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인하여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서울특별시중랑구망우동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그로부터 42년 후인 2010년10월 10일서울특별시중랑구망우동 묘소에서 강원도강릉시사천면 노동리 133-1번지 선영으로 유해가 이장, 봉안되었다.
가족 관계
재취 부인인 이복순은 이화여전 출신으로 1942년 재혼했지만, 김동명이 최용건의 핍박을 피해 흥남을 탈출하면서 이복순과 두 딸은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