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는 굴아화현의 일부였다. 굴아화현은 757년에 하곡현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에 우풍현, 동진현과 통폐합하여 흥례부가 되었다. 흥례부는 995년에 공화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018년에 다시 울주로 승격하고, 1413년에 울산군이 되었다. 울산에 면이 설치되면서 남구 지역은 대대면(大垈面)이 되었다. 내대면(內大面)과 외대면(外大面)으로 분리되었다가 궁현면(弓峴面)으로 다시 합쳤고, 후에 대현면(大峴面)이 되었다. 고종 31년(1894년)에 여천천을 경계로 내현면(內峴面)과 외현면(外峴面)으로 분리되었고, 1911년에 외현면이 현북면(峴北面)과 현남면(峴南面)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4월 1일 : 내현면은 상부면(중구 일부)과 통합하여 부내면(府內面)이 되고, 현북면과 현남면을 대현면(大峴面)으로 통합하였다.
남구 장생포동이다. 과거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포구이다. 장생포 연안은 귀신고래가 많이 서식하는 바닷가라고 하여 울산 극경 회유 해면이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한 밍크고래,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 종이 다수 서식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고래고기를 먹는 풍습이 없었고, 교통의 미비로 고래고기의 유통 역시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고래잡이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한반도에서 고래잡이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48년미국에 의해서이다.
장생포에서 고래잡이가 시작된 것은 1899년, 러시아의 태평양어업 주식회사에 의해서였다. 이 회사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포경 허가권을 양도받아 조업을 시작하였으며, 장생포를 고래 해체 작업장으로 이용하였다. 이 때부터 장생포는 포경의 전진기지로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1905년의 러일 전쟁 이후에 포경 허가권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장생포의 고래잡이는 일본 포경선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1915년에 한반도 각지의 포경기지가 정비되면서부터는, 장생포가 고래잡이의 중심항이 되었다. 이 때에 생산된 고래고기의 대부분은, 소비량이 많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한반도의 고래잡이는 한국인들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포경회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 포경선에서 조업을 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 200여명이 출자하여 설립한 조선포경주식회사이다. 이 회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이들 한국인 종업원들에 대한 체불임금과 퇴직금 몫으로, 일본수산주식회사로부터 목조 포경선 두 척을 양도받아 장생포를 중심으로 조업을 시작했다.
울산 서부지역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울산만을 거쳐 동해로 이어진다. 울산의 지역문화는 전통적으로 태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태화강은 울산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중구 다운동과 남구 무거동을 잇는 삼호교에서 하구까지는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옛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국내 유일의 고래박물관을 건립하여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 보존·전시하고 고래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해양생태계 및 교육연구 체험공간을 제공하여 해양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2005년 5월 개관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