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고등학교 졸업 후 199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입단하였다.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이 선수 층이 얇았던 투수진과 선발로 육성할 신인을 찾아 그가 많은 기회를 얻었는데, 패전 투수가 많이 되면서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쌍방울의 주축 투수로서 성장했으나 약했던 팀 전력 때문에 잘 던지고도 패전 투수가 된 경기가 많아서 좋은 시즌에는 5할 승률을 기록하고, 좀처럼 두 자리 승수를 달성하는 일이 보기 드물만큼 없었다. 그가 최고의 성적을 올렸던 1998년 이후 모회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구단은 주력 선수를 현금 트레이드로 '선수팔이' 작업식으로 운영비를 마련하던 때였으나 주축 선수 중 유일하게 그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팀이 해체될 때까지 팀과 함께 했다. 1998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 특례를 받았다.
1999년7월 10일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장종훈의 타구가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고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고, 그가 빠진 뒤 팀은 13연패를 당하는 등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그가 재활과 수술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팀은 해체됐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된 후 오상민 등 다른 팀 메이트들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인계해 새로 창단된 팀으로 입단하며 창단 멤버가 됐다. 그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해에 당한 얼굴 부상 때문에 타구에 대한 공포감에 애를 먹었는데, 초창기에도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과 사정은 변하지 않아 빈약한 투수진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많아져 구위 저하로 인해 성적이 하향세를 그렸다. 하지만, 이후 기교파 투수로 맞춰 잡기식으로 투구 패턴을 바꾸며 2004년부터 다시 부활의 기미가 보였다. 2007년에는 케니 레이번, 마이크 로마노 등의 외국인 용병 투수들의 선발진 가세로 그는 중간계투로 보직이 변경됐지만 팀은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거두며 데뷔 17년 만에 우승의 기쁨을 느꼈다.
현역 시절 소속 팀 전력이 약했던 시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통산 성적이 134승(100선발승) 144패로 패가 더 많은 탓에 2008년4월 24일롯데 자이언츠전 선발승으로[1]그의 마지막 선발승이자 역대 9번째 세 자릿수 선발승 투수가 됐다.
그는 역대 통산 2,000이닝 이상을 소화한 선수들 중 유일한 현역 선수였다. 2009년 시즌 후 KBO 리그 통산 2,168.2이닝을 소화해 개인 최다 투구 이닝 4위로 기록됐다.
그는 젊은 시절 한화 이글스에 특히 약하다는 평을 들었다. 장종훈이 그의 주무기 구종인 커브 볼 배팅에 능했고, 1999년에 장종훈이 친 강습 타구에 코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어 시즌을 마감한 것이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미친 것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기고 장종훈이 은퇴한 뒤부터는 한화 이글스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동기인 박경완과는 전주중앙초등학교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 왔고, 전주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기량이 떨어져서 프로 팀 입단이 불투명하던 박경완이 쌍방울 레이더스에 육성선수로 입단하게 도운 것도 그였다.
포스트시즌 노히트 노런 : 1996년 10월 20일 현대 정명원 (한국시리즈 4차전, 인천 해태전)
최고령 기록 2000년 5월 18일 송진우 (34세 3개월 2일) 최연소 기록 1993년 4월 30일 김원형 (20세 9개월 25일) 비공식 기록 1992년 5월 13일 롯데 박동희 (사직 쌍방울전, 6회 강우콜드) 합작 노히트 노런 : 2014년 10월 6일 LG 신정락, 유원상, 신재웅 (잠실 NC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