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창단 멤버로 입단한 후 2002년에 2할대 타율, 17홈런, 68타점의 수준급 성적을 비롯해 3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하며 주전 좌익수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2004년 그가 어깨 부상으로 입원하던 중 병역 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적발[1]되면서 이듬해 공익근무요원으로 입소했고, 2008년에 소집 해제 후 복귀했으나 그가 복무 중인 사이 기량이 성장한 외야수 김강민에 주전 경쟁에서 밀려 2008년5월 4일 3:2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다.[2]
이후 대타로 간간히 출장해 1할대 타율, 4홈런, 16타점을 기록했다. 2009년 시범 경기 중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고, 부상의 여파로 이듬 해에는 29경기에 그쳤다. 2011년에는 단 1차례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 후 방출됐다.
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당시 NC 다이노스의 감독이었던 김경문의 부름을 받아 타격코치로 선임돼 그가 현역 시절 신생 팀에서 프로에 입문한 것처럼 지도자도 신생 팀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3]2013년kt 위즈의 코치로 선임됐다.[4]2015년에 잠시 1군 코치로 있었으나 코치진 개편으로 잔류군 야수코치로 이동했고, 2015년 시즌 후 타격보조코치로서 1군에 복귀했다.
별명
이름이 같은 이종범의 별명 중 하나인 '종범갑'이라는 별명에서 따온 '종범을'이라는 별명이 있다.
에피소드
마산고등학교 시절에 유격수로 활약하며 청소년 대표에 뽑혔다. 이때 그와 키스톤으로 호흡을 맞췄던 2루수는 그의 1년 후배이자 kt 위즈의 내야수였던 신명철이었다. 한편 신명철과는 kt 위즈에서 처음 함께 했다.
2007년SK 와이번스가 창단 이래 첫 우승을 했을 때 그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 중이었고, 2008년에는 3:2 트레이드로 KIA 타이거즈에 이적하면서 친정 팀의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 2009년에는 시범 경기 중 부상으로 정규 시즌이 되기도 전에 시즌 아웃되며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그는 SK 와이번스는 자신이 부재 중이었을 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으며 KIA 타이거즈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5] 그는 2003년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에 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