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음(山陰)/산청(山淸)과 단성(丹城)의 두 고을이 합친 군으로, 산음(산청)은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이며 경덕왕 때 산음으로 고려 공양왕 때 감무, 조선 때에는 현감을 두었다. 1767년 산청으로 개칭되고 고종 3년(1895) 군으로 되었고, 1914년 단성군을 병합하였다. 단성군은 신라의 궐지군(闕支郡)으로 경덕왕 때 궐성으로 고쳤고 후에 군이 되었다. 그 후 많은 변천 끝에 1914년 산청군에 병합되었다.
산음현(山陰縣)
산음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나타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지방관제로서 9주 5소경을 완성한 것은 문무왕(文武王) 17년에서 신문왕 17년이었다. 경덕왕 16년에 이 고장 명칭이었던 지품천현(知品川縣)을 산음현(山陰縣)으로 개칭하여 궐성군(闕城郡) 소속게 하였으며 그 후 현치(縣治)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서 지금의 생초 "곱내"에 두어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있어 그 초기에는 신라시대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8대 현종 때 지방제도가 완성됨에 따라 산음(山陰)과 단계(丹溪)는 합천(陜川)에, 강성(江城)은 진주(晋州)에 소속케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2년에 산음현과 강성현에는 중앙에서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통치케 하였다. 감무란 현감을 두지 않은 작은 현의 행정책임자를 말한다. 이 때 산음과 강성은 독립현이 되어 합주와 진주의 관할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단계는 이때 합주로부터 강성현에 소속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직후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게 되는데 산청에 있어선 현치(縣治)를 고읍(古邑)에서 신읍(新邑)으로 옮긴 다음 최초의 감무(監務)가 파견케 되었다. 조선 14대 선조 32년 왜구(倭寇)의 분탕으로 단성이 일시 산음현에 통합되었으며 이 해는 정유재란(1597年)이 일어난지 2년 뒤였다. 단성은 15년 후에 독립군으로 복귀했다.
산음현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말의 일제침략 과정에서 큰 변동을 겪게 되었다. 갑오경장후 고종 32年(1895년)에 단성과 함께 각각 군으로 승격되었다. 을사늑약을 맺은 다음해인 광무 10년 1906년(병오) 9月 24日 칙령 제49호로 진주군에서 파지(巴只), 백곡(栢谷), 금만(金萬), 사월(沙月), 삼장(三壯), 시천(矢川)의 육면(六面)을 분할받아 군의 규모가 배가된 것이다.
단성현(丹城縣)
삼국사기에 나타난 단성 최초의 명칭은 궐지군(闕支郡)이다. 경덕왕 16년(757년) 궐지군은 궐성군(闕城郡)으로 명칭되어 이때의 현치(縣治)는 성내리(城內里)에 있었다. 궐성군은 산음(山陰) 단계(丹溪) 두 현을 속현으로 삼았다(757~1018의 261년간이다.) 고려시대에 들어 강성현(江城縣)으로 개명되어 치소(治所)를 강누(江樓)로 옮겼다.
경상남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소백산맥과 그 지맥에 둘러싸인 산간분지로 지리산(1,915m), 황매산(1,104m)·웅석봉(熊石峯, 1,099m) 등 높은 산이 솟아 있다. 면적 794.61km2, 인구 3만 5,903명(2015.01 기준)이다. 역내를 남강의 상류 경호강·덕천강·양천강 등이 흘러 그 유역에 침식분지를 발달시켰다. 군의 동부는 경상계 낙동통의 지층이며 혈암·사암·역암 등이 분포되어 있고, 서부 지리산 일대의 지질은 화강편마암이다.
기후
남쪽에 위치하여 온난하나 산간지방에는 한서의 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은 13 °C, 1월 평균기온은 0.4 °C, 8월 평균기온은 25.1 °C, 연평균 강수량은 1,556.2mm이다.
농업이 주업이며 쌀·보리·콩의 생산이 많다. 지리산 기슭에는 목재·한지·목기·죽기의 산출이 있다. 한편, 양잠이 자연적 특성에 맞아 잠업단지를 조성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기타 산간 지방에서는 그 지역의 실정에 맞는 밤나무·축산 등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지하자원으로서는 고령토 생산이 하동군을 앞서는데, 대명·특리·단성·오서·산청 등의 광산이 유명하며 이를 재료로 한 요업이 활발하다.
금서면에 카이 조립 공장 위치.
황매산철쭉제 : 매년 4월말부터 5월초까지 황매산 기슭에서 철쭉축제가 열린다. 철쭉사진전시, SNS 홍보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들이 함께 열린다.[10]
교통
고속도로로는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있다. 국도로는 국도 제3호선, 국도 제20호선, 국도 제33호선, 국도 제59호선이 있다. 산청교통에서 농어촌버스를 운행 중이다. 철도 교통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대전에서 함양을 거쳐 산청군을 통과하는 대삼선이, 해방 후 김천에서 함양을 거쳐 산청군을 통과하는 김삼선이 계획되었으나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김천에서 합천을 거쳐 진주로 가는 남부내륙선 계획이 수립되었고, 최종적으로 산청군 동부의 생비량면을 통과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선로용량 확충을 위해 산청신호장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