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 및 태권도, 여자 사이클, 여자 사격이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실시되었으며, 27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이 대회에서는 83개의 아시아 신기록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참가국은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의 36개 회원국 중 27개국 4,839명(임원 1,420명, 선수 3,420명)이 참가함으로써 아시안 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유치과정
1977년 수출 10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를 넘으면서 다시 한번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자는 애기가 나왔고 1979년에 마침내 공식적으로 유치에 도전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2] 2년 후 열리게 될 올림픽과 함께 아시안게임을 연달아 개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방안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이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를 개최한 경험이 없었던지라 아시안게임을 통해 개최 능력을 보여준 뒤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데 유치 확정 발표를 않고 미적미적거리던 1980년 10월 말에 뜬금없이 개최 신청서를 접수한 곳이 있었으니 북한의 평양시였다. 그 여파로 남북한 아시안게임 유치대결이 펼쳐졌다.[3]
1981년11월 26일에 인도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연맹(AGF,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OCA)의 전신) 총회에서 대한민국서울이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로 선정되었다. 서울과 함께 유치 경쟁에 나섰던 이라크바그다드, 북한 평양이 유치 신청을 철회하면서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4]
유도, 태권도, 여자 사이클, 여자 사격의 4부문이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인도의 P. T. 우샤는 4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수상하여 다관왕에 올랐다. 그녀가 세운 100m, 200m, 400m, 400m 허들, 400m 계주, 1600m 계주 기록은 아직도 인도의 국가신기록이다.
일본의 남자 투포환선수인 무로후시 시게노부는 아시안 게임 5연패를 달성하였다.(1970-1986) 후에 그의 아들인 무로후시 고지는 1998년과 2002년 아시안 게임 같은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부자(父子)가 아시안게임 한 종목에서 7회나 우승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중국은 보이콧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더군다나 당시 중국은 대한민국과 수교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은 1990년 아시안 게임 차기 개최국이기도 하였으며 2년 후에 열렸던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참가하였다.
중국이 종합순위 1위를 하였다. 대한민국은 중국에 금메달 1개 차로 종합 2위를 한 반면, 일본은 처음으로 종합 3위로 추락하였다.
대한민국은 총 메달 224개로, 중국의 222개보다 2개 더 많아 총 메달 수에서는 종합 1위를 거두었다.
최윤희 선수는 여자 배영 100m하고 200m에서 금메달을 따서 2관왕에 등극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대회개막 4개월전 임춘애는 전국체육대회에서 1500m, 3000m, 10km 3관왕을 휩쓸자 국가대표로 전격 발탁됐다. 주종목이 아니었던 여자 800m에서 인도의 쿠리신칼 아브라함 선수가 2초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코스이탈로 실격돼 임춘애에게 행운의 금메달이 돌아갔다. 주종목인 1500m 결승에서 우승후보였던 중국의 양유하(梁柳霞) 선수를 극적으로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전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어 다음날 3000m 결승에서 1위를 해 육상 3관왕에 등극하여 희대미문의 대기록을 달성하였다(그 당시의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았음).
양궁의 양창훈 선수는 남자단체전, 70m더블, 50m더블, 30m더블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4관왕에 올라 대한민국 선수중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 개인종합에서는 일본의 노장 마쓰시타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중국, 대한민국, 일본의 3개국이 획득한 금메달은 245개로, 총 금메달 270개의 91%에 달하였다.
대회 개막 5일 전 김포국제공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였다. 이는 북한이 이 대회를 방해하려고 저지른 것으로 추측되나 뚜렷한 증거는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