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94년 MBC 《테마극장》으로 MBC 특채 연기자 첫 데뷔, 드라마 《보고 또 보고》 및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등 연기자로서의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던 중, 2002년 출연한 KBS2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04년 일본에서 가수로 데뷔, 본격적인 해외활동을 펼쳤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당시 레이블은 포니 캐년이었으며, 소속사는 업프런트 에이전시였다.
활동
2004년11월 17일에 발매된 싱글 앨범 《가지마세요》는 한국 남성 아티스트 역사상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0위권에 진입하였으며 2005년에는 한국가수 최초로 일본 골든디스크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고 그 이후로도 4년 연속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5년 만에 한국 SBS 수목미니시리즈 《온에어》의 까칠한 이경민 PD로 컴백,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해 촬영에 들어간 한국최초의 주식 영화 《작전》에서는 한탕을 꿈꾸는 개미투자자 강현수로 열연하여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2009년 4월부터 6월까지 방영된 KBS2 월화미니시리즈 《남자 이야기》에서는 돈으로 대변되는 세상에 맞서는 주인공 김신으로 변신,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대했다.
사망
2010년6월 30일 새벽 5시 31분경 강남구 논현동의 자택에서 밧줄과 전깃줄 그리고 캠코더용 충전기 전선으로 목매 숨져있는 것을 발견됐다.[2] 박용하는 발견 약 1시간 반 전인 오전 4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술을 마신 상태에서 집에 귀가하였다.[3]
유가족의 뜻에 따라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
경찰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우울증 등 병력은 없었다. 다만 부친의 암투병, 사업 활동과 연예활동 병행에 따른 어려움에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7월 1일 오후 방송된 SBS 연예정보프로그램 '한밤의 TV연예'에서는 박용하 생전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망에 대해 방송했다. 지난 2008년 5월 '한밤의 TV연예'와 인터뷰에서 박용하는 "그래프를 그리자면 원하지 않는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작품을 하면 상향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고 인기 굴곡에 따른 고민을 내비쳤다. 그런 굴곡진 삶이 자주 외로움을 불렀다고 말했다.[4]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했던 기간의 고민도 소개됐다. 2005년 인터뷰에서 박용하는 "제가 갑자기 일본을 오게 된 게 아니고 4년이란 시간동안 (한국에서) 활동을 안 하니까 '박용하가 끝났구나' 말하기도 한다"면서 "제가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 오는 게 되게 힘들었던 거 같다. 그 마음을 지켜오기가 힘들었던 거 같다"고 토로했다.[5]
다만, 박용하는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 "사람들이 가끔씩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부모를 위해 천천히 가겠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하지만 마지막 글은 월드컵 대표팀을 응원하는 내용뿐이어서, 트위터 배경만으로 이를 예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6]
현재 자살동기는 분명히 밝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박용하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팬들 못지않게 일본팬들의 애도물결도 많았다. 그의 장례식에 많은 일본팬들이 참석했고 그 후에도 계속 애도분위기가 식지 않고 이어져 일본방송에서의 추모프로그램과 더불어 일본의 한류 전문지 '핫 칠리 페이퍼(Hot Chili Paper)'는 박용하를 추모하는 특별판 '용하 포에버'를 7월 30일 발간한다고 발표했다. 박용하의 앨범 '스타스(Stars)'도 2일 장례식 이후 절판됐다가 팬들의 요청에 12일 재발매에 들어갔다.[7] 2013년 유가족은 박용하가 아프리카 차드에 설립한 요나스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봉사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박용하 One Love 자선사업회'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