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이다.[2]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사실상 일본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창덕궁이왕(昌德宮 李王)으로 불렸다.
생애
탄생과 세자 책봉
1874년(고종 11년)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3]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조졸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하다.
1898년(광무 2년) 9월 11일, 김홍륙의 사주를 받은 공홍식이 김종화를 시켜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향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그 커피를 땅에 부었으나, 황태자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였다. 이로 인해 황태자는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범인인 김홍륙은 같은 해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5]
1910년(융희 4년) 일본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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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다.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대한제국을 끝으로 소멸하였으며 전제군주정이 붕괴되었으며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창덕궁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퇴위 이후
일본 방문
1917년 6월, 순종은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도쿄를 방문해 일본 천황을 알현할 것을 강요받는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첫 외유(外遊)이기도 하였다.
6월 8일, 경성을 떠나 부산으로 간 순종은 6월 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11일에는 나고야에, 12일에 도쿄에 도착하여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알현을 받고 14일에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를 만나 오찬에 참석한 뒤, 16일 토리이자카에 있는 왕세자궁을 방문하여 영친왕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