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7년(1398)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안대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세자는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정안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奉元良)의 보고[3]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고 만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 등 정안대군의 시점에서 부정적인 세력이 제거되고 난 뒤, 정안대군 세력은 세자를 방석에서 영안대군 이방과(永安君 李芳果·후일의 정종)로 교체했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李居易)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방석을 죽였다.
사후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에 안장되고 오원공(五原公)에 추봉되었다. 태종 6년(1406) 9월 14일(음력 8월 3일), 태종은 방석에게 소도군(昭悼君·또는 소도공), 방번에게 공순군(恭順君·또는 공순공)의 시호를 추시했다. 숙종 6년(1680) 8월 21일(음력 7월 27일), 숙종은 신원정치의 일환으로 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방번을 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추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음력 8월 26일 1번째 기사. 봉원량의 보고만을 놓고 봤을 때, 제1차 왕자의 난에 동원된 정안군 측 병력이 상당히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기사에 정안대군 측의 병력은 수십여 명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태조실록이 태종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당히 윤색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활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