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복(韓圭復, 일본식 이름: 井垣圭復이가키 게이후쿠, 1881년7월 7일 ~ 1967년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해방 후에도 화가로 활동했고, 기업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곡자의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반민특위에 자수한 뒤, 조사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인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배경이 되는 엘리트 출신 고위관료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5회 수상하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자(字)는 덕중(德仲), 호는 온재(溫齋)이다.
생애
초기 활동
출생과 수학
1881년(고종 17년) 7월 7일한성부 평동(平洞) 19번지에서 주사 한만홍(韓晩洪)과 평산 백씨(平山白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한규호는 구한 말 군인으로 활동, 보병참위와 보병부장을 지냈고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퇴역 후 1908년(융희 2년) 기호흥학회의 창립에 참여, 회보인 기호흥학회월보의 후원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기업인으로도 활동하여 1908년 6월 4일 한성의 연강목선운륜(沿江木船運輸) 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집안은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종조부인 개국공신한상경[1]의 후손으로, 유암 한계윤(柳岩 韓繼胤)의 20대손이다. 한계윤은 한명회와 6촌 형제간이며, 외할아버지는 성달생으로 성승과 성삼문은 각각 외삼촌과 외사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하급 무관을 역임하다가 5대조부터는 증직 벼슬만이 전한다. 한규복의 할아버지 한수익(韓守益)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호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증조부 한도흥(韓道興)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조부 한윤기(韓潤琦)는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외할아버지 백우혁(白佑赫)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자(字)는 덕중(德仲)이고, 호는 온재(溫齋)라 하였으며, 서예작, 그림에는 본명 또는 온재라는 아호, 낙관을 썼고 일부 작품에는 온이재(溫二齋)라는 서명을 넣기도 했다.
1902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유도도장인 강도관(講道館)에 다녔다. 공승화전개(일본 工勝花雷介)의 《비록일본유도(秘錄日本柔道)》의 기사와 일본강도관에 조회한 바에 의하면 1902년 한규복 등이 강도관에 입문하여 유도를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그는 1902년8월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3] 일본의 유도 전승에 자극받은 그는 귀국 후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상소를 올려 택견 관련 인물과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상주하기도 했다.
1935년2월 6일에는 경성부에서 윤치호 등이 조직한 계명구락부재단(啓明俱樂部財團) 위원의 한 사람에 위촉되었다.[6]1930년대 중반 이후 그는 각종 계몽, 강연회를 다니면서 근검 절약의 필요성, 불필요한 사치품과 물건 강매, 사재기 등을 하지 말 것, 저축을 하여 가사 경제에 보탬이 되게 할 것, 도박과 노름, 사행성 복권 등 헛된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여 대가를 취할 것을 강조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7][8] 인물평은 “탁월한 식견과 정려한 행동으로 출세”한 인물로 되어 있으며, 소신과 추진력이 있어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고 민정을 순화시켰다고 적혀 있다.
참정권 획득 계획과 실패
1936년에는 그는 참정권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9]이규완의 조선인참정권론, 자치권 획득론에 공감하게 된 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조선인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번번히 묵살되었다.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9]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9]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중일 전쟁 전후
1937년1월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8년8월 설치된 총독부내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97명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박중양, 박흥식, 윤덕영, 이기린(李基燐), 이승우(李升雨), 최린(崔麟), 한상룡(韓相龍), 현준호(玄俊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원 11명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 시행되자 한규복은 윤치호, 이승우, 조병상, 조성근 등과 함께 지원병제 축하회 구성을 위한 타협발기인회를 열고 실행위원진을 구성하였다. 7월 8일국민정신총동원연맹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10월 7일에는 중일전쟁 등 부상병을 위문하기 위해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하고 금일봉을 지급하였다.[11]
천운(天運)이 순환하사 우리 대한민국이 탄생되니 산천(山川)과 초목이 다시 금빛이 나고 잃었던 자유가 우리 몸에 다시 오니 일반의 환희는 무엇으로 형용하리요. 하물며 일제시대에 허다의 압제를 견디면서 관리생활을 계속한 본인으로서는 더욱더욱 감개무량이외다. 본인은 대한제국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조도전 대학早에서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고로 행정관으로 출세하여 민중지도에 노력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관계(官界)에 투신하여 도지부 서기관으로 재임한 채로 병합을 당하여 임시토지조사국 감사관에 임명되었을 때 본인은 자신처리에 대하여 재삼 고려한 결과 나의 지력과 성력의 한도대로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는 견해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여 도지사를 역임하고 正4位 勳3등까지 되었으니 가위 고급관리의 지위까지 점진하였다고 하겠으며 30여 년간 관리생활을 하는 중에 민중의 계발을 여하(如何)한 정도로 하였느냐 하면 구체적으로 진술할 재료는 제공치 못하나 다만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든지 항론도 사양치 아니 하였으며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정렴근(公正廉謹)으로서 관계일생(官界一生)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天人)이 공인(共認)하는 바 옵니다. 그러하니 민중에 대하여 행복이 되고 이익이 된 점을 일일이 수거치는 못하고 다만 장구한 세월의 관리생활을 하였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변명하오리까. 금일에 지하여는 전일의 양심적으로 민중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보도, 노력한 점은 무형(無形)으로 돌아가고 다만 관계생활(官界生活)을 하여 일제에 아부한 자로 추인되어 이 점이 기탄불기(慨歎不已)할 뿐더러 관리생활로 일생을 보낸 것이 참회되는 바이며 근신(勤愼)할 뿐이 옵니다. 오직 현명한 당국의 선악을 분별하사 관대한 처분만 바라옵고 감히 소회(所懷)의 일단을 진백(陳白)하나이다.
1949년8월 12일반민특위에 편지를 보낸 뒤 그는 서울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로 자수, 스스로 찾아갔다. 그는 자수한 점이 감안되어 구속되지 않고, 출두 형식으로 조사를 받았다.
반민특위 조사와 석방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14]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변호사였다.
“
나는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나 항론을 사양치 않고,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명염근으로써 관계 일생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이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17]
”
한규복은 자신은 오로지 민중의 계발 보도를 위해 일했음을 강조하였다.[17] 또한 자신은 "민족 지도자"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18] 심문 과정에서 그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저항하되, 조선총독부의 정책이나 일본의 정책을 맹신, 맹종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심문에 응하였다.
《친일파 군상》에서는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18] 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하여 그의 처벌에는 반대하는 여론도 나타났다.
1949년8월 31일의 반민특위 최종 심리에서 그는 반민법(제4조 2항, 3항) 위반의 혐의를 받았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사실及이유 본건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의 의견서 기재 범죄사실에 관하여 수사한 바, 피의자는 한일합방 전부터 일제시대까지 30여년 간에 亘하여 관리생활을 계속하고 최후에 중추원참의까지 임명받은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으나, 평소 그가 악질적으로 민족에게 해를 끼쳤다는 현저한 증거가 없음으로 주문과 如히 결정함'이라고 결정되었다. 그는 순순히 수사에 협조, 진술하여 정상 참작이 되었다. 1950년 초 한규복은 김시권(金時權) 등과 함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최후
1950년부터 청주한씨 중앙종친회(淸州韓氏中宗親會) 회장에 추대되어 1954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해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의 글씨를 남겼고, 화법은 수묵화, 수묵담채화, 컬러 수묵화와, 소재로는 풍경화, 바위, 난초, 나무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1950년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갔다. 한동안 한국곡자 운영과 종친회 일 이외에는 사양하며 칩거하였다. 1960년7월 2일에는 주간종합잡지 주간대중(週刊大衆) 지의 동인이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19] 그밖에 고서화, 미술품, 그림 감정, 감별도 하였다. 1959년3월 6일손재형, 최승만 및 미술계 전문가, 대학교수 470여명과 함께 추사 김정희 작품을 감정하고 평론을 남겼다.[20]
그는 1926년~1930년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선전(鮮展)' 또는 '조선미전(朝鮮美展))에 공식 데뷔, 다섯 번 입선한 화가였으며, 수묵 담채화와 붓글씨 서예작을 다수 남겼다. 그의 작품들 일부는 해방 후 그가 친일파로 몰려 규탄당하면서 사라졌고, 6.25 전쟁 등을 겪으며 일부 사라졌지만, 6.25 이후의 작품 일부는 현재 전해지고 있다.
한규복만큼 영달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초기에 고도간에 다녔던 조선인 학생들은 거의 다 저항보다 체제 순응을 선호했다.[26]
그가 맹목적인 친일파 민족반역자였는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이견이 존재하였다. 반민특위의 보고서에는 그를“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14]
그러나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보고서인 《친일파 군상》에서는 맹목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인정해 주었다. 《친일파 군상》에 의하면 그를 가리켜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로 분류하였다.[27] 한규복과 전라북도도지사를 지낸 손영목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친일 또는 아부자가 아니었다 한다"며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18]
사회운동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두용(金斗鎔)은 그가 악성 반역자는 아닌 것으로 봤다. 그에 의하면 '고관 전직자, 친일파의 거두 등은 기장지무(巳張之舞[28])이니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우리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29]
'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