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부의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 1919년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당시 그는 해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거사일에는 서울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 참가했으며, 오현경을 통해 해주의 만세 운동도 조직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은 16명이었고, 이 가운데 감리교인이 9명이었으며, 최성모는 이필주, 신홍식, 박동완, 박희도, 김창준과 함께 북감리교 소속이었다. 이 가운데 이필주와는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전덕기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입교한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