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거사 당일에 민족대표 33인들이 태화관에서 실내 행사를 갖은 뒤 자진 연행 형식으로 체포되자 강기덕과 함께 3월 5일 학생 위주의 후속 시위를 벌이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김원벽은 이 만세 시위를 조직하여 대표 역할을 맡았고, 체포될 당시에는 인력거를 타고 깃발을 흔들며 군중을 지휘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박희도가 설립한 좌파 경향의 《신생활》(新生活), 최남선의 《시대일보》에 근무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리원에서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