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이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날 때 18세의 나이에 영덕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경상북도 동해안 지방을 차례로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에 경북 출신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하락 부대에 안동의 유시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의 의병 연합 부대가 영덕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여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투신 자살하면서 그의 의병대도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1905년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이후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군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척 격침시키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상북도 내륙 지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들도 만들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와 순흥(영주시)을 공격하는 연합 작전을 시도하는 등 계속되는 전과를 올리면서 경북 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부상하여, 이인영의 연합 의병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 출신의 유학자 의병대장들도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망
1908년부터는 유시연의 부대와 연계하면서 주로 유격전 위주로 병 항쟁을 펼치다가, 그해 겨울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암살되었다.(신돌석이 동료의 배신으로 사망했다는 의견도 있다.)
피살 과정
그를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살해범이 김상렬(金相列) 삼형제라는 것이다.[1]
신돌석의 부하였으며 외사촌 또는 이종사촌들로 가까운 친척이었던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金相泰), 김상호(金相浩)와 함께 신돌석에게 걸려 있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리고 그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인 뒤 도끼로 살해하였다는 설이다.
신돌석의 시체를 일본군에 바쳐 많은 상금을 타려는 속셈으로[2] 이들은 독주를 만들어 신돌석 앞에 내놓았다. 그는 이 독이 든 술을 들이키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 김상렬 형제는 도끼로 신돌석을 내리쳤다.
살해범의 이름이 김도윤, 김도룡(또는 김도용) 형제라는 설[3], 범인은 김자성이고 그가 신돌석의 고종 사촌이었다는 설[4] 도 있다.
한편,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신돌석의 고종형제 김자성(金自聖)이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쳐죽였다고 하며 신돌석의 유해를 들어옮기고 일본 헌병대에 발고하였으나 생포하지 않고 살해 후 발고하였다는 까닭으로 일본 헌병대로부터 퇴짜를 맞고 현상금을 받는 데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