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周時經, 1876년12월 22일 (음력 11월 7일)~1914년7월 27일)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전문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한글 표준화를 추진하였고, 후진양성과 더불어 민족자주 차원에서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며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개척자이자 선각자다.[1]
본관은 상주, 초명은 상호(相鎬), 자는 경재(經宰), 호는 한힌샘, 백천(白泉)이다. 독립협회 활동 중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어 문법을 정리하였다.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토론회, 만민공동회의 자료를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글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홀대 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여[2][3][4] 사용하게 하였다.[5] 현대 한글체계를 정립하고 보급하였으며, 한국어 연구에 공헌하였다. 민족주의 사상을 지녀 한글 교육에도 힘썼으며,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것 또한 민족적인 정체성 추구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근현대 한글 연구에 있어 최현배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주시경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6]
생애
1876년황해도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周鶴苑)과 연안 이씨의 4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周頤)의 17세손. 어린 시절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관명(冠名)은 시경(時經)이다. 할아버지 방렬(方烈)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와 살다가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정승 주세붕(周世鵬)의 후예이다.
1887년 12세에 서울남대문 안 시장에서 해륙물산객주업을 하는 둘째 백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한국민속 대백과사전] 한글날 (문화체육관광부, 국립민속박물관)...한글이라는 이름은 언문, 반절, 가갸글 등으로 불러 오던 훈민정음을 1910년대에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한 국어 연구가들이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라는 뜻으로 지어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 쓰임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 가치의 재발견, 주시경 (우리말의 수수께끼, 2002. 4. 20., 박영준, 시정곤, 정주리, 최경봉)...'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3년 간행된 《아이들 보이》라는 잡지의 끝에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다. 이 명칭은 조선어학회가 훈민정음 반포 8회갑이 되는 해(60×8=480)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하여 '가갸날'로 부른 뒤, 1928년에는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다. '한글'은 '한(韓) 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가는 글'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