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이며, 1594년(선조 27년) 7월 1일, 강원도원주의 우소(寓所, 임시로 거주하는 곳)에서 당시 원주목사로 부임중이던 아버지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어머니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의 2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40일 만에 어머니 황씨가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신씨 부인이 양육하였다.[1]
인열왕후의 할머니인 신금희와 외할아버지인 황성은 태종의 왕자인 효령대군의 5대손이며, 인열왕후의 부모는 효령대군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6대손이다.
1626년(인조 4년) 1월, 공주를 출산하였으나 반년만에 요절하였고, 1629년(인조 7년), 다섯째 대군을 출산하였으나 역시 요절하였다.
인열왕후는 인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조가 언관(言官)을 특별히 체직시켰을 때에는 “말이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간의 이름을 지닌 관직인 이상 처치할 때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고 언로(言路)를 막게 될 듯 싶습니다.” 하고 간하기도 하였다.[4]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엄동설한이나 무더운 여름철에는 위사들이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음식을 내려 주곤 하였다.[4]
최후
1635년(인조 13년) 12월 4일, 여섯째 대군을 낳았으나 낳자마자 죽었다.[5] 5일 후인 12월 9일, 창경궁 여휘당의 산실청에서 산후병으로 인해 승하하였다.[6]인조는 인열왕후를 간호했던 의관들을 잡아 문초하였으며 인열왕후의 출산을 도왔던 봉보부인 응옥(應玉)을 유배하였다.
중전이 대군의 죽음으로 인해 병이 위독해져,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백관이 거애(擧哀) 하고 복장을 바꾸었다. —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1635년 명 숭정(崇禎) 8년) 12월 9일 (을유)
사후
시호 및 능묘
시호는 인열(仁烈)이며,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한다.[7]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란 시호를 내리길 원했으나 대사헌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고 하여 인열로 정해졌다.[7]
전호는 숙녕(肅寧)이며, 휘호는 정유명덕정순(正裕明德貞順)으로 아들 효종이 '명덕정순'을, 고종이 '정유'의 존호를 추상하였다.
능은 경기도파주시탄현면에 있는 장릉(長陵)으로 인조와의 합장릉이다. 최초의 매장지에 뱀과 전갈이 나타나고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자, 1731년(영조 7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8]
일화
한 궁녀가 인열왕후에게 광해군의 후궁이었던 숙원 한씨(한보향)가 광해군을 잊지 못해 눈물을 흘린다고 알리자, 보향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보모상궁으로 임명하였다.
능양군의 첩인 숙의 장씨를 후하게 대하였다. 반면 이성길의 딸로 첩으로 뽑힌 궁인 이씨는 청성현부인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9]
청성현부인의 언니와 친척 부인들이 자주 궁궐을 출입하자 사관이 이를 비판하였다.[10] 실록에서 언급된 여이징의 아내는 청성현부인의 둘째 언니이고, 정백창의 아내는 셋째 언니인데, 모두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원군 이세완과 혼인한 청성현부인의 이복 동생인 현부인 한씨 또한 병자호란 때 자결하였다. 이 밖에도 한준겸의 자손 10여명이 궁궐 내에 있다가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모두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