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과 인선왕후의 딸로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효종의 딸, 현종의 큰누나, 숙종의 고모라는 입장을 앞세워 횡포를 부리고 백성들의 땅과 세금을 갈취하여 세 왕의 노골적인 비호에도 불구하고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서인의 당색을 드러내며 정사에 간여하였는데, 조카인 숙종에게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의 조카인 조사석이 임명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1], 남인인 희빈 장씨와 숭선군의 아들 동평군 등과 반목하였다.
숙안공주와 숙명공주의 언동은 숙종의 분노를 자아냈고, 숙종은 기사환국때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을 처형하였다. 이후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과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생애
탄생과 군주 시절
1636년(인조 14년) 4월 28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과 풍안부부인 장씨(인선왕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인 숙신공주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서에는 첫째 딸로 기록되어 있다.
1637년(인조 15년), 아버지 봉림대군과 어머니 장씨가 청나라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는데[2], 당시 돌이 채 되지 않았던 숙안공주는 부모와 같이 청나라로 가지 않고 궁중에서 양육되었다.[3]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가 급서한 이후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다음 해인 1646년(인조 24년) 왕세자의 적녀에게 내려지는 작위인 군주(郡主)로 봉작되어 숙안군주(淑安郡主)가 되었다.[4]
1649년(인조 27년) 4월, 현감 홍중보의 아들인 홍득기(洪得箕)가 익평부위(益平副尉)로 간택되었다.[5] 그러나 다음달인 5월 8일에 인조가 사망하여 혼례가 미루어졌다.
공주 시절
인조 승하 후, 아버지 효종이 즉위하여 숙안공주(淑安公主)에 봉해졌다. 혼인이 결정된 익평부위 홍득기는 익평위(益平尉)로 진봉되었다.[6]인조의 삼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혼례가 마땅히 미루어져야 했지만 1650년(효종 1년) 조선의 공주를 비(妃)로 맞이하겠다는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구혼이 있자, 효종은 다음해 1월, 간략한 절차로 숙안공주와 홍득기의 가례를 진행하였다.[7] 공주를 대신해 종실 금림군의 딸이 효종의 양녀가 되어 의순공주의 작위를 받고 도르곤의 비(妃)가 되었다.[8]
1673년(현종 14년) 6월 29일, 남편 홍득기가 특별히 봉군되어 익평군이 되었다.[9]
불행
1673년 11월 27일에는 남편 홍득기가 39세의 나이로 급작스레 사망하였다. 1689년(숙종 15년)에 발발한 기사환국 후 선왕의 딸이자 현왕의 고모인 어머니의 뒷배를 믿고 악행[주 1]을 거듭해온 아들 홍치상(洪致祥)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10]
1697년(숙종 23년) 12월 22일 훙서하였다.[12]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그 상제를 동생인 숙휘공주의 것을 따르게 하였고 선왕대의 관례에 따라 친히 숙안공주의 초상에 나아가 임곡하였다.[13] 숙안공주는 남편 홍득기의 무덤에 같이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산 24에 위치하고 있다.
행적
효종의 딸, 현종의 큰누나, 숙종의 고모라는 입장을 앞세워 횡포를 부리고 백성의 땅과 세금을 갈취하여 세 왕의 노골적인 비호에도 불구하고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정사에 간여하여 조카인 숙종에게 정승 임명에 대한 불만[14]을 토로했고[1], 기사환국 후엔 아들 홍치상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과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1694년 3월 26일 체포된 한중혁, 이시도 등의 자백으로 발각되어 극형[15]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다음날 숙종이 일으킨 갑술환국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16]
↑갑술환국 발발 후 숙종은 민암 등의 죄를 논하며 당시 남인이 세 공주(숙안, 숙명, 숙휘)를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윤5월 29일 (을미) 원본358책/탈초본19책 (17/17)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 (무진)
↑익평은 숙안공주의 남편 익평위 홍득기의 작호이다. 출가한 왕녀의 죄를 논할 때 왕녀의 작호로 거론할 때도 있지만 친 혈육인 왕의 입장을 고려해 남편의 작호로 대신하거나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이나 궁호(혹은 당호)로 대신하기도 했고, 주가(主家)나 궁가(宮家)를 쓰기도 했다.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를 가리킨다. 이날 이 전교가 있기 직전에 인현왕후의 인척인 한성우가 김창협·김만길·송주석 등에 이어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고 '과거 송 인종이 새로이 여인을 얻고 기뻐하였다가, 현명한 대신의 충언을 받고 부끄러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회개하며 즉시 여인을 내쳤던 것을 본으로 삼아 나흘 전 후궁으로 삼은 희빈 장씨의 숙원 교지를 취소하고 당장 폐출할 것'을 상소했다. 이에 이제껏 장씨에 관한 모든 공격을 무시로만 일관했던 숙종이 기어이 분노를 터트리며 한성우에게 벌을 내린 것을 비롯, 앞서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여 희빈 장씨의 출궁을 종용한 대신들(전원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일족들)에게 엄중히 경고를 함과 동시에 그간 입궁하여 장씨의 출궁을 종용해왔던 숙안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홍치상의 어머니)·숙명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심정보의 어머니)·숙휘공주(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인척)·명안공주(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인척)에게도 경고를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