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하간왕에 봉해졌다.[1][2]유학을 좋아해 행동거지를 유자에 맞추고, 산동의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1][2]
학문을 닦아 옛 것을 좋아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였다.[3] 민간에서 좋은 책을 얻으면 베껴다가 진본은 자신이 가지고 사본을 주며 보상했고 또 멀리에서까지 많은 도술사가 와서 옛 책이 있으면 헌왕에게 진상하니, 그렇게 해서 얻은 고서의 양이 한 조정과 맞먹었다. 하간헌왕은 수많은 선진 시대의 고서를 모았으며, 곧 《주관》(周官) · 《상서》 · 《예》 · 《예기》 · 《맹자》 · 《노자》 등 온갖 경 · 전 · 설 · 기와, 공자 70제자의 논과 · 육예 등이었고, 《모시》(毛詩)와 좌씨춘추박사를 세웠다.[2]
무제 때 입조해[4], 아악을 바치고 삼옹궁을 대했으며, 또 조서로 30가지의 질문을 받았다.[2] 재위 26년 만인 원광 5년(기원전 130년) 정월에 죽었고, 대행령구가 상주하여 시호를 헌(獻)이라 했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