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류군(陳留郡)은 전한부터 수나라까지 존속한 중국의 옛 군급 행정 구역이다. 군국제 시행 시에는 제천국(濟川國)·제양국(濟陽國)·진류국(陳留國) 등이 설치됐었다. 중심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양, 진류, 소황, 준의로 옮겨갔다. 현재의 허난성카이펑 시 일대와 상추 시·신샹 시의 일부를 관할했다.
전한
한나라에서 원래는 양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경제 중5년(기원전 145년) 양효왕 사후 양나라를 다섯으로 분할해 새로 제천나라를 두고 유무의 아들 제천왕 유명에게 봉하면서 진류군의 연혁이 시작된다. 서울은 제양현에 뒀다. 유명이 죄를 지어 봉국이 폐지되면서 한 조정의 관할로 들어갔고, 전한 무제가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에 옛 제천나라 영역에 처음으로 진류군을 설치해 치소를 진류현으로 옮겼다. 13주를 두면서 연주에 속했다.[1][2][3]
평제 시기에 시행된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29만 6284호, 인구 150만 9050명이 있었다. 17현을 두었다.[2]
140년(후한 순제영화 5년)대 진류군은 17현 177,529호 869,433명을 거느렸다.[6]189년소제가 즉위했을 무렵 그의 동생 유협이 진류왕으로 봉해지면서 진류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동탁에 의해 소제가 폐위되고 유협이 황제로 옹립되면서 진류국이 폐지되었다.[7]후한말에는 태수 장막이 통치했으나 조조가 본군에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8]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진류현
陳留縣
카이펑시 샹푸구 진류진(陳留鎭)
준의현
浚儀縣
카이펑시
본래 대량(大梁)이었다.
위씨현
尉氏縣
카이펑시 웨이스현
현 경내에 능수향(陵樹鄉)이, 현 북쪽에 천자완유(天子菀囿)가 있는 못(澤), 진악구(秦樂廄)가 있었다.
옹구현
雍丘縣
카이펑시 치현
현성내에 신정(神井)이 있었다.
양읍현
襄邑縣
상추시 쑤이현
현내에 활정(滑亭), 승광성(承匡城)이 있었다. 193년(후한 헌제초평 4년) 조조가 유상과 원술을 격파했다. 원술이 봉구현으로 물러났는데, 조조는 그곳을포위했다. 이에 원술이 양읍으로 도주했다.[9]
외황현
外黃縣
상추시 민취안현 내황서촌(內黃西村) 일대
현내에 규구취(葵丘聚), 번양성(繁陽城)이 있었다.
소황현
小黃縣
카이펑시 샹푸구 야태촌(冶台村) 일대
동혼현
東昏縣
카이펑시 란카오현 번채촌(樊寨村) 일대
제양현
濟陽縣
카이펑시 란카오현 고양진(固陽鎭)
현내에 무부향(武父鄕)이 있었다. 두예에 따르면 현 동북쪽에 무부성(武父城)이, 현 동남쪽에 융성(戎城)이, 현도향(縣都鄉)에 광무제가 태어난 행궁이 있었다고 한다.
평구현
平丘縣
신샹시 창위안현 남서
현 경내에 임제정(臨濟亭), 황지정(黃池亭)이 있었다.
봉구현
封丘縣
신샹시 펑추현
현 경내에 동뢰정(桐牢亭)이 있었다. 193년 형주목 유표가 원술의 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은 군대를 이끌고 본현에 주둔했다. 흑산적의 잔당과 어부라가 그를 도왔다.
산조현
酸棗縣
신샹시 위안양현 연북촌(延北村)
장원후국
長垣候國
신샹시 창위안현 북
현경내에 광성(匡城), 포성(蒲城), 제성(祭城)이 있었다.
기오현
己吾縣
상추시 닝링현 이오성(已吾城)
현내에 대극향(大棘鄕), 수향(首鄕)이 있었다. 189년(후한 영제중평 6년) 조조가 본현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고성현
考城縣
상추시 민취안현 서남 맹장(孟庄) 일대
85년(후한 장제원화 2년) 치현(菑縣)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름이 바뀌면서 양군에서 본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어현
圉縣
카이펑시 치현 어진진(圉鎭鎭)
본래 회양의 속현이었으나 후에 본군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현경내에 고양정(高陽亭), 만인취(萬人聚)가 있었다.
동진말, 유유가 후진을 격파하고 중원을 수복하면서 일시적으로 동진의 땅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유유가 중원에서 철수하면서 북조의 땅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북위가 북조를 통일하자 북조의 땅으로 편입되었다. 493년(북위 효문제태화 17년) 북위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며 낙주가 사주로 개명되자 낙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528년(북위 효명제효창 4년) 일부지역이 동군의 일부지역과 함께 양하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534년(북위 효무제영희 3년) 동위가 건국되자 동위의 땅으로 편입되었고, 일부지역이 개봉군으로 분리되면서 군역이 축소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카이펑시 일대가 양주로 분리되자 양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동위 때 진류군은 3현 19,613호 82,742명을 거느렸다.[13]576년(북제 고위융화 원년) 개봉군이 통폐합되면서 군역이 넓어졌다.[14]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준의현
浚儀縣
카이펑시
진류군의 치소이자 양주의 치소였던 대량성(大梁城)이다. 북위 중기 폐지되었다가 526년(북위 효명제 효창 2년) 재설치되었다. 현 경내에 신릉군묘(信陵君冢). 장이의 묘(張耳冢), 동중서의 묘(董仲舒冢), 번어기의 묘(樊於期冢), 변양의 묘(邊讓冢), 창원성(倉垣城)이 있었다. 거수(渠水)가 대량성 동쪽에서 나뉘는데 이를 채거(蔡渠)라고 한다. 수나라 때
봉구현
封丘縣
신샹시 펑추현
448년(북위 태무제태평진군 9년) 산조현(酸棗縣)에 통폐합되었다가 501년(북위 선무제경명 2년) 재설치되었다. 봉구성(封丘城)에 치소를 두었다. 현 경내에 봉구대(封丘臺), 백구(白溝)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