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군(膠東郡)은 진나라에서 설치한 중국의 옛 군이다. 진나라 당시의 이름은 즉묵군(卽墨郡)이라고도 한다. 대략 북 자오라이 하(중국어: 胶萊河 교래하[*]) 이동의 산둥반도 동부를 관할했다. 전한에서는 대부분 교동국(膠東國)의 영토였다.
유래
북 자오라이 하의 옛 이름, 교수(膠水)의 동쪽에 있음에서 유래했다. 즉묵(卽墨)이라는 이름은 즉묵성이 묵수(墨水) 유역에 있음에서 유래했다.
진
통일 진나라 36군에는 속하지 않으나 이후 낭야군을 분할해 세웠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다. 진나라 봉니 중 “즉묵태수(卽墨太守)”라 써진 것이 있어, 원래는 교동군이 아니라 즉묵군이었을 것이라 한다. 치소는 즉묵현(현 핑두 시 남동)이다. 즉묵·창양(昌陽)·야(夜)·황(黃)·추(腄)·동모(東牟)·창무(昌武)·임구(臨胊) 8현이 확인된다.[1]
전한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18제후왕을 세우면서 교동군은 전 제왕인 전시에게 내려져 교동나라가 만들어졌으나, 전시가 항우에 대한 태도를 놓고 실권을 쥔 재상 전영과 불화해 전영에게 살해당하면서 교동나라는 망하고 전영이 왕위에 오른 제나라에 흡수됐다.[2][3]
제나라가 한나라의 장군 한신의 공격으로 망하고 한신이 고제에게 제왕으로 봉해졌으나,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고제가 한신을 초왕으로 옮기면서 제나라 전 지역이 전한의 직할이 됐다. 고제가 6년(기원전 201년) 서장자 도혜왕을 제나라에 봉하면서 교동군도 제나라에 속했다.[4][5][6][7] 제나라는 기원전 165년 문왕의 죽음으로 폐지됐다가, 이듬해에 도혜왕의 아들들에게 분할 부활하면서 교동군은 도혜왕의 아들 유웅거의 교동나라가 됐다. 교동왕 유웅거가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해 주살돼 교동나라는 폐지되고 교동군이 됐다.[6][7][8] 경제 4년(기원전 153년) 경제의 10남 무제에게 봉해져 다시 교동나라가 됐으나 이 과정에서 동래군이 교동군에서 분할돼 교동나라는 오초칠국의 난 이전보다 축소됐다. 경제 6년(기원전 150년) 무제가 태자가 되면서 도로 교동군이 됐고, 경제 중2년(기원전 148년) 4월에 경제의 11남 강왕이 교동군에 봉해진 이래 전한이 망할 때까지 교동강왕의 후손에게 나라가 이어졌다.[8][9][10][11]
청주에 속하였으며,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72,002호에 인구 323,331명이었고, 서울은 즉묵현이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6]원연·수화 연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8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