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변론을 맡은 주요 사건은 대부분 70, 80년대의 시국사건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인권변호사로서 독재 정권은 물론 세상의 불의와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여, 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변호사와 함께 1970~80년대 네 명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꼽힌다. 그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 대표 등 정의의 실현과 인권회복을 위한 모든 일에 앞장섰으며, 계간 《문학과지성》의 창간, '문학과지성사'창사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세례명: 세바스티아노) '계명복지회'를 설립, 자폐 아동들의 교육과 복지에 힘썼고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창립했다. 그러던 그는 1990년부터 지병을 얻어 1993년 1월 20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공원 묘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변론을 맡은 주요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 지학순 주교 사건,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3·1 구국 선언 사건. 동아·조선투위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한승헌 필화사건, 동일방직노동 사건, YH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원풍모방 사건, 강원대학교 성조기 방화 사건, 오송회 간첩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서울 미문화원 사건, 건국대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사건, 임수경·문규현 방북 사건, 윤석양 사건 등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