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의 한(漢)족계 이주민 출신의 아버지의 아들로 출생한 그가 출생한 지역은, 고려의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인데, 1320년(충숙왕 7년)의, 2월 24일(음력 1월 15일)에,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에서 태어났으며, 원나라셴양(咸陽)에서 출생한, 고려 이민자 출신의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경상도의 영산군(靈山郡) 출신의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무녀독남)로 태어났다.[5][6]
혜근(惠勤) 선사는, 일단 1339년(충숙왕 후7년)의 춘삼월(春三月)에는,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은 고향 친구의 장례 등을 보고 나서, 20세에 출가했으며, 속세를 털어버린 이듬해 1340년(충혜왕 후1년)의 정월(正月)에, 묘적암(妙寂庵)의 요연(한국 한자: 了然)이라는 선사한테 득도했다.[5]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양광도양주 소재 회암사에서, 지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5]
1347년(충목왕 3년)에 원나라 말기 시대의 옌징(燕京(연경): 현재의 중공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름 난 승려들을 직접 찾아 가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었고, 특히 이듬해 1348년(충목왕 4년)에는, 원나라의 서역의 둔황(敦煌)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었던, 옛 천축국(현재의 인디아)의 불교의 승려지공선사(地空禪師)의 설법(법도)을 이어받았다.[5]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구월산에 들어갔었고,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그 후 여러 산사(山寺)를 돌아다녔다. 1366년(공민왕 15)에 금강산에 있었고, 1369년(공민왕 18년)에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갔다.[5]
1370년(공민왕 19년)에는 회암사(檜巖寺)에, 자신의 스승인 요연(了然, 1299년 출생~1370년 입적)이라는 선사(禪師)의 유골을 안치했고, 같은 해의 음력 9월 10일에는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했다.[5]
1371년(공민왕 20년)에,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하사받았으며, 그와 동시에 왕사(王師)이자,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이고,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이며,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해졌다. 그 후 송광사에 있었다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또한 각 지역의 사찰(절)을 중수 및 중축했다.[5]
1376년(우왕 2년)에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인하여, 혜근은 밀양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이 때 병이 도졌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재의 대한민국 경기도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결국 차라리 떠나지 않고,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5]
↑혜근(惠勤, 1320년생~1376년졸; 속명은 아원혜) 선사 그의 부친 아서구(한국 한자: 牙瑞具, 1288년생~1331년졸, 원래 원나라셴양 출생.)의 경우에는, 1288년, 원(元)의 산시(陝西)의 셴양(咸陽)에서, 한족(漢族)의 후손(무녀독남 외동아들)으로 출생하였으며, 만6세 시절이었던, 1294년(충렬왕 20년)에, 지난날 쓰촨청두·산둥칭다오 등으로 시집 떠난 두 고모(姑母)들은, 아쉽게도 원나라 자국에 남기어 두고, 부모(父母)·조부모(祖父母)와 함께 모두 다섯 명(직계 일족)이서만, 원나라의 셴양 향리를 떠난 훗날, 같은 해(1294년)에 원나라를 아주 출국하였고, 고려(高麗)의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로 건너온 이후 사실상 고려에 정착하여, 훗날 고려의 경상도영해에서 조부모상(祖父母喪)과 부모상(父母喪)을 모두 치렀으며, 1331년(충혜왕 1년)에, 고려(高麗)의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에서 하세(향년 44세)한, 원나라의 고려 이민자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