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라인 퓌어 베베궁스슈필레 슈투트가르트 1893 e. V.(Verein für Bewegungsspiele Stuttgart 1893 e. V.) 혹은 줄여서 VfB 슈투트가르트(VfB Stuttgart)로 알려진 이 클럽은 독일바덴뷔르템베르크주슈투트가르트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이 클럽은 축구 클럽으로 가장 유명하며, 3번을 제외한 모든 분데스리가 시즌에 참여하였다. 이 팀은 5번의 리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최근에 들어 우승한 시즌은 2006-07 시즌이다. 이 클럽은 리그 외에도 DFB-포칼 우승을 3회 경험하였다.
슈투트가르트의 홈 구장은 MHP아레나로, 네카어파크 (Neckarpark, 칸슈타터 바센 지역에 위치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단지) 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2군팀으로 레기오날리가에 참가 중인 VfB 슈투트가르트 II를 운영하고 있다. 이 외에도 U-19 청소년 팀은 10번을 우승한 U-19 리그 최다 타이틀 기록을 보유한 팀이며, U-17팀 또한 6번의 우승을 경험하였다.
VfB 슈투트가르트는 멤버쉽 제도 클럽으로, 2011년9월 기준, 43,636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최대 스포츠 클럽이자, 독일에서 5번째로 큰 클럽이다. 그 외에도, 성공적인 프로, 아마추어, 유소년 축구팀, 그리고 클럽의 체조부는 다수의 타이틀과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클럽은 축구와 체조 외에도 피스트볼, 하키, 탁구, 축구 심판부를 운영한다. 이 다섯개의 부서는 아마추어 부만 운영한다. 이 클럽은 VfB-가르테 (VfB-Garde) 라는 사회 부서를 운영한다.
역사
창단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버라인 퓌어 베베궁스슈필레 슈투트가르트 (Verein für Bewegungsspiele Stuttgart)는 1912년 4월 2일, 기존에 존재하던 슈투트가르터 FV (Stuttgarter FV) 와 크로넨-클럽 칸슈타트 (Kronen-Club Cannstatt) 가 칸슈타트의 콩코르디아 호텔 회의를 통해 합쳐지며 창단되었다. 이 두클럽은 중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1] 이들은 영국인들로부터 럭비와 축구 같은 새 스포츠를 배우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에 럭비를 처음 전한 사람은 1865년의 윌리엄 케일이었다.[2]
슈투트가르터 FV
슈투트가르터 푸스볼버라인 (Stuttgarter Fußballverein) 은 1883년 9월 9일, 춤 베허에 의해 창단되었다.[3] FV는 원래 럭비 클럽으로, 스퇴카흐-아이스반을 연고로 하다가, 1894년 칸슈타터 바센으로 이전하였다. 럭비 클럽은 1908년에 축구부를 창단하였다. 이 팀은 주로 지역 학교로부터 선수들을 불러모았고, 카를 카우프만 선생의 지도 하에, 빠른 시간내에 첫 성공을 거두었다. 1909년, FV는 럭비 결승에서 FSV 1897 하노버에 3-6으로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4] 럭비는 관중들에 의해 규칙이 복잡하다고 지적됨에 따라 나중에 축구 클럽으로 대체되었다.
1909년, FV는 남독일 축구 협회 (Süddeutschen Fußballverband)에 가맹되어,[5] 2부 리그인 B-클라세에 속하게 되었다. FV의 2번째 시즌에, 나중에 통합되어 VfB 슈투트가르트가 되는 크로넨-클럽 칸슈타트와의 지역 결승에서 승리하였지만, FV 추펜하우젠과의 국가 챔피언쉽에서 패하였다. 이 경기는 그들의 승격이 달려 있었으며, 그들은 결국 1912년에 쉬드크라이스리가 (Südkreis-Liga)로 승격되었다.
크로넨 클럽 칸슈타트
칸슈타터 푸스볼클럽 (Cannstatter Fußballklub) 은 1890년에 럭비 클럽으로 창단되었고, 이후 축구 클럽을 창단하였다. 이 클럽은 몇년 후인 1897년에 FC 크로네 칸슈타트 (FC Krone Cannstatt) 로 개칭하였고, 축구부만 남게 되었다.[6] 새 클럽은 남독일 축구 협회에 가맹하여 2부리그에 속하게 되었고, 1904년에 1부리그로 승격하였다. 칸슈타트의 옛 구장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TSV 뮌스터가 사용하고 있다.
1912년, 두 클럽의 통합 이후, 통합된 클럽은 뷔르템베르크 크라이스리가에 속해있다가 베지어크스리가 뷔르템베르크-바덴 (Bezirksliga Württemberg-Baden)으로 옮겨졌고, 상위 3위를 차지하고 1927년에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 클럽은 또한,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SFV의 결승전에 종종 등장하였다.
1933-1945
1933년, VfB는 홈구장을 네카어슈타디온으로 옮겼다. 같은 해, 독일 축구는 독일 제 3제국에 의해 16개의 가울리가 (Gauligen) 이라 불리는 1부리그로 개편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에 속하였고 성공적인 시대를 보냈다. 슈투트가르트는 1935년, 1937년, 1938년, 1940년, 그리고 1943년에 우승을 경험하였다. 1944-45 시즌, 가울리가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와의 라이벌 관계가 이 시기에 생겨났다.
VfB의 가울리가 우승 타이틀은 국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하였으며, 1935년 그들은 4-6으로 FC 샬케 04에 패한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1937년 국가 플레이오프에서 3위를 획득한 이후, 슈투트가르트는 그 이후로 예선을 넘지 못하였다.
1950년대 챔피언쉽
전후, VfB는 1부리그인 오베르리가 쉬드 (Oberliga Süd)에 속하여 1946년, 1952년, 그리고 1954년에 우승을 하였다. 이팀은 독일 챔피언쉽에 진출하여 1950년과 1952년에 우승을 경험하였고, 1953년에는 준우승을 하였다. 1950년대, 클럽은 DFB-포칼을 두 번 (1954년, 1958년) 경험하였다. VfB는 8년간 4개의 타이틀을 교통 사고로 팔을 잃은 로베르트 슐린츠의 지도 하에 이루어냈다. 그러나, 어느 선수도 1954년 FIFA 월드컵의 선수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1958년 FIFA 월드컵과 1962년 FIFA 월드컵의 실망적인 결과에 따라, DFB는 1963년에 단일 1부 프로축구 리그인 푸스볼-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다. 슈투트가르트의 1950년대에 획득한 우수한 성적은 분데스리가의 1963년 16개 원년 클럽중에 하나로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이 클럽은 당시 슈바브 사회 단체의 아마추어 조직으로, 돈을 쓰는데 인색하였고, 일부 선수는 투잡으로 생활하였다. 10여년간 클럽에 균형을 잡은 뒤, 클럽은 대체로 중위권에 머물렀다. 이 당시 유명 슈퍼스타로는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길베르 그레스였다.
1972-73 시즌, 팀은 UEFA 컵 진출권을 처음으로 획득하였고, 1974년에 팀은 준결승에 진출하여, 이 시즌의 우승 팀인 페예노르트에 패하였다. (1-2, 2-2)
1975-2000: 마여-포어펠더 회장 시대
VfB 슈투트가르트는 1970년대 중반, 스폰서쉽을 비롯한 새로운 트렌드에서 뒤쳐지며, 재정난이 닥쳤다. 지출을 통하여 새로운 프로시대에 대응하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1974-75 시즌 말, 2 분데스리가 강등 위기까지 닥쳐왔다. 지역의 정치인 게르하르트 마여-포어펠더는 구단의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는 바람에 VfB는 16위로 마감하고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었다. 첫 번째 2 분데스리가 시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되었고, VfB는 심지어 지역 라이벌 SSV 로이틀링겐과의 홈 경기에, 1200명의 관중 앞에서 패하였으며, 시즌을 11위로 마무리하였다.
이 젊은 팀은 공격적인 플레이와 고득점 경기는 인기를 불렀지만, 경험 부족으로 문제에 직면하였다. 1977-78 시즌 종료 후, VfB는 시즌을 4위에 랭크되었고, 1990년대까지 53,000명 이상의 관중 기록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1980년에 또다스 UEFA 컵에 진출하여 준결승까지 진출하였고, 1980년에도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며, 1980년대에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84년, 헬무트 벤타우스 감독은 슈투트가르트를 우승시켰다.)
1991-92 시즌, 클럽은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에 다시 올랐고, 이는 가장 치열한 타이틀 경쟁의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시즌 종료 후 승점이 동률이었지만, 골득실 차에 의해 우승을 획득하였다. 국다대항전에서, 그들은 UEFA 컵 2라운드에서 스페인 라 리가의 CA 오사수나에게 2-3으로 패하였다. 리그 챔피언으로써, 클럽은 UEFA 챔피언스리그 1992-93에 진출하였지만,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패해 탈락하였다. 이 라운드는 본래 슈투트가르트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지만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이 앞선 두 경기에서 비독일인 선수를 필드 위에 3명을 초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는 데에서 발단되었다. 결국 3차전을 바르셀로나에서 치루었고, 결국 패하여 탈락하였다.
VfB는 이후 1997년 요아힘 뢰프의 지도 하에 DFB-포칼을 우승할 때까지 어느 유럽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였다. 1998년, 슈투트가르트는 UEFA 컵 위너스컵에 참여하였고 스톡홀름에서 열린 결승까지 진출하였지만, 결국 결승에서 첼시 FC에게 패하였다. 매직 트라이앵글 3인방 중 한 선수인 크라시미르 발카로프만이 이후에 잔류하였고, 나머지 지오바니 에우베르와 프레디 보비치는 클럽을 떠났다. 뢰프 감독 또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그의 공백은 빈프리트 섀퍼로 대체되었고, 그는 1시즌만에 경질되었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의 성적은 발카로프와 같은 베테랑을 대체하기 위해 무분별한 지출을 하였고, 그에 따라 팀의 성적은 중위권으로 추락하였다.
2000-현재: 마여-포어펠더 이후의 성공
많은 빚이 쌓이고, 실망스러운 결과가 겹치며, 게르하르트 마여-포어펠더회장은 2000년에 사임하여, 독일 축구 협회, UEFA, FIFA의 보드진이 되었다. 새 회장 만프레트 하스는 예산과 드물게 출전하는 선수들의 연봉을 삭감하여야 했다. 1976년, 마여-포어펠더가 회장을 맡은 이후, 팀은 유스 출신 선수들로 리빌딩을 하여야 했다. VfB는 독일 최고의 유소년 훈련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실망스러운 2005-06 시즌 중간,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경질되었고, 아르민 페가 그 자리를 맡았다. 새 감독은 2003년에 가족 생활을 위해 FC 한자 로스토크 감독을 그만두었으며, 2004년에만 고향 클럽 FC 아우크스부르크의 감독직을 맡았다. 새 감독은 호르스트 헬트의 지원 하에, 다시 축구로 복귀할 수 있었다. 팀 주장 츠보니미르 솔도가 은퇴하고, 다른 베테랑들이 팀을 떠남에 따라 팀은 9위로 마감하였고, 4년 만에 처음으로 어느 유럽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였다.
더 나아가서, VfB는 DFB-포칼 결승에 진출하여, 10년만의 포칼 정상 탈환과 클럽 역사상 최초의 더블 기회를 잡았다. 베를린에서 만난 포칼 결승 상대는 1. FC 뉘른베르크로, 1962년에 마지막으로 포칼 우승을 거두었으며, 정규 시즌에 0-3, 1-4의 3점차 패를 두 번이나 안긴 팀이었다. 전반전을 1-1로 마친 뒤, 슈투트가르트의 득점자 카카우는 퇴장당하였다. 1. FC 뉘른베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2-1 리드를 가져갔으나, VfB는 결국 2-2 동점골을 기록하였다. 연장전 후반, 습한 기후와 피로로 고전하는 와중, 뉘른베르크는 결승골을 득점하였다.
2008-09 시즌도, 전 시즌처럼, 시작이 좋지 않았다. 14라운드 종료 후, VfB는 11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아르민 페 감독은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마르쿠스 바벨이 사령탑에 올랐다. 2009년 1월 DFB-포칼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1-5로 대패해 중도 하차한 뒤, 슈투트가르트의 상황은 호전되었고, 결국 시즌을 3위로 마감하였다. VfB는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승리 시 준우승과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도 노릴 수 있었으나 패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이는 슈투트가르트가 UEFA 챔피언스리그 복귀가 가능함을 뜻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을 예선을 통하여 본선에 합류해야 했다. VfB 슈투트가르트의 3차 예선 상대는 FC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로 2009년 8월 18일과 8월 26일에 차례로 1, 2차전을 치루었다. VfB는 티미쇼아라를 꺾는데 성공, 6년동안 3번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였다. (2003년과 2007년 그리고 2009년)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서 슈투트가르트는 스페인 라 리가의 거상 세비야 FC, 2000년대에 들어 3번째로 만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레인저스 FC, 그리고 루마니아 리그 챔피언이자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한 FC 우니레아 우르지체니와 함께 G조에 편성되었다. 이 조별리그에서 슈투트가르트는 2승 (레인저스 FC와 FC 우니레아 우르지체니에 각각 1승) 3무 (조별리그 세 상대로 모두 1무씩 기록) 1패 (세비야 FC를 상대로)를 기록하여 극적으로 G조 2위 자리를 가져가 16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16강에서 전 시즌 챔피언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홈에서 환상적인 경기로 1-1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이어지는 캄프 누 원정에서 0-4로 완패하여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VfB 슈투트가르트의 홈구장은 MHP아레나로 1933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경기장은 네카어강변에 위치하며 바트 칸슈타트 (Bad Cannstatt)의 메르세데스 벤츠 박물관과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 인근의 메르세데스 거리 (Mercedes-Straße) 에 위치한다.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친 후, 이 경기장은 55,896명을 수용 (국가대항전에서는 50,000명 수용)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분데스리가 경기장과는 다르게, 이전의 네카어슈타디온은 필드 가장자리에 육상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2011년에 축구전용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974년 FIFA 월드컵과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6년 FIFA 월드컵의 경우 6경기를 개최하였는데, 4번의 조별리그 경기, 1번의 16강 경기, (잉글랜드와 에콰도르의 경기) 그리고 3위 결정전 (독일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개최하였다. 2008-09 시즌, 2008년 7월 30일자 아스널 FC와의 프리시즌 경기를 기점으로 경기장은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로 개칭되었다.[7] 경기장은 2008-09 시즌을 시작으로 축구 전용 구장으로 교체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2011년 리모델링 완료 후, 60,000명으로 수용력이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