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j], 공식 명칭으로 독일국[k] 또는 대독일국[l]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한 전체주의 독재국가이다. 이 국가를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인 제3제국[m]은 나치가 자신들을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과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면서 사용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며 수립된 나치 독일은 스스로를 천년 제국[n]이라고도 지칭했지만, 불과 12년 뒤 연합군이 베를린에 입성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종전된 1945년 5월 국가가 해체되었다.
1933년 1월 30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 이후, 나치당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이후, 히틀러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하여 퓌러라는 직위를 만들고 국민투표를 통해 취임했다. 이로써 독일의 권력은 히틀러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그의 말은 곧 법이 되었고, 정부는 조정하고 협력하는 기구가 아니라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여러 세력의 모임으로 변질되었다. 대공황 시기 나치는 막대한 군사 지출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회복하고 대규모 실업 위기를 종식시켰으며, 적자 지출을 감당하면서까지 아우토반 개발 등 사회 기반시설 개발에 더불어 국방군 강화를 포함하는 재군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러한 나치의 정책으로 독일의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히틀러 정권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이후 나치 정권은 영토 확장을 위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시행했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무시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협박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Anschluss)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합병했다. 이후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켰다. 1940년까지 독일은 이탈리아 등의 추축국 동맹국들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점령하고 영국을 위협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둔 이후, 동유럽에서 인종적 청소를 위해 게네랄플란 오스트, 굶주림 계획 등을 시행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반격과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1943년부터 독일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고 1944년 말까지 독일 본토까지 후퇴했으며, 독일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확대되고 추축국은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독일 동부는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서쪽은 서방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항복을 결정하지 않던 히틀러가 4월 30일 사망하고, 결국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항복 이후 연합국은 탈나치화 정책을 전 유럽에서 시행했으며, 살아남은 나치 지도층 중 대부분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전쟁 범죄로 기소했다.
명칭
나치당 집권 시기의 독일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나치 독일"과 "제3제국"이며, "천년 제국"(Tausendjähriges Reich)이라는 용어도 종종 사용되었다.[4] 이 용어들 중에서 "제3제국"이라는 단어는 이후 나치의 선전에 활용된 아서 모엘러 반 덴 브룩의 1923년 출판된 《제3제국》(Das Dritte Reich)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5] 책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을 "제1제국"으로,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을 "제2제국"으로 분류하여 나치 독일이 이들의 뒤를 이은 "제3제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6]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 독일의 경제에 심각한 침체가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침체의 이유 중 하나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해 많은 돈을 찍어냈지만,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화폐 가치가 떨어졌으며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이 빈번해졌다.[7] 독일 정부가 1923년 1월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의 산업 지역을 점령했고, 독일 내에서도 광범위한 반란이 일어났다.[8]
"나치당"이라는 단어로 흔히 알려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은 1919년 만들어진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의 이름을 바꾸어 1년 뒤인 1920년 창당했으며,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여러 극우 정당 중 하나였다.[9]나치당의 강령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베르사유 조약의 거부, 급진적 반유대주의와 반볼셰비즘이 포함되었다.[10] 이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의 확대, 인종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의 형성,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을 포함한 적극적인 탄압을 통한 인종 청소를 주장했다.[11] 나치당은 푈키셰 운동(Völkische Bewegung)에 기반한 국가적, 문화적 쇄신을 제안했으며,[12] 나치의 준군사조직이었던 돌격대(Sturmabteilung), 또는 갈색 셔츠단은 정치적 입장을 확대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경쟁 집단의 회의를 방해하고 거리에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 또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다.[13] 이러한 극우 무장 단체는 당시 바이에른 지역에서 흔했으며, 구스타프 리터 폰 카어의 극우 세력에 호의적이었던 주 정부에서 별다른 제지 없이 용인되었다.[14]
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대폭락이 발생했을 때, 독일의 경제에 미친 영향은 참혹했다.[15] 수백만의 독일인이 일자리를 잃고 주요 은행이 붕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은 비상사태를 이용해 지지를 확보하려고 준비했으며, 경제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16] 많은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내전을 진압하며, 독일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32년 7월 국가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하여 국가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다.[17]
나치당은 1932년 두 차례의 국가의회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지도자가 되지 않는 한 연립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18] 결국 경제계의 기업가, 산업가들과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했으며, 이 사건은 "마흐테르그라이풍"(Machtergreifung, 권력 장악)이라는 단어로 잘 알려져 있다.[19]
1933년 2월 27일 밤, 국가의회 의사당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나치당의 주장에 따라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반 데르 루브가 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며 유죄 판결을 받았고, 히틀러는 이러한 방화가 공산주의 봉기의 시작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1933년 2월 28일 〈국가의회 화재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집회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시민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경찰의 기소 없이 사람들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법안은 나치당의 선전 캠페인 속에 통과되었으며 캠페인은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나치당의 돌격대는 전국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했고 독일 공산당원 4천 명을 체포했다.[20]
1933년 3월 23일, 바이마르 헌법을 개정한 전권 위임법이 국가의회에서 444표 대 94표로 통과되었다.[21] 이 법안은 히틀러와 그의 정부가 대통령이나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22] 이 법안의 통과는 3분의 2 이상의 의원들의 찬성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치당은 협박과 국가의회 화재법의 조항을 사용하여 공산당 소속 의원들의 출입은 완전히 금지했으며 여러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23][24] 법안의 통과 이후, 전권 위임법은 나치당과 히틀러가 수립한 독재 정권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25]
5월 10일 정부는 사회민주당의 자산을 압류했고 6월 22일 당을 불법 정당으로 선언했다.[26] 6월 21일 돌격대는 이전의 연정 파트너였던 국가인민당의 사무실을 급습했으며, 6월 29일 당은 해산되었다. 나머지 주요 정당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해산되었다. 최종적으로 1933년 7월 14일, 〈정당 결성에 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독일은 일당제 국가가 되었고, 나치당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이 되었다. 법률은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금지했고, 아직 해체되지 않은 모든 정당을 불법이라고 선언했다.[27]1933년, 1936년, 1938년에 실시된 이후의 선거들은 나치당의 통제를 받았으며, 나치당원과 소수의 무소속 의원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28]
모든 시민 단체의 지도부는 나치당의 동조자나 당원으로 대체되었고, 나치당의 휘하로 합병되거나 해체되었다.[29] 나치 정권은 1933년 5월 1일을 "전국 노동의 날"로 선포하고 많은 노동조합 대표들을 베를린으로 초대하여 축하 행사를 열었다. 그 다음 날, 돌격대가 전국의 노동조합 사무실을 급습하여 파괴하였고, 모든 노동조합은 해체되었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30] 〈전문 공무원 복직을 위한 법률〉은 유대인이거나 나치당에 대한 헌신이 의심스러운 모든 교사, 교수, 판사, 치안판사, 공무원을 직장에서 해고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31] 이로써 나치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비정치적 기관은 교회뿐이었다.[32]
나치당은 흑적금 삼색기를 포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상징을 폐지하고 재작업된 상징을 채택했다. 이전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가 독일의 두 공식 국기 중 하나로써 복원되었지만, 이후 1935년 9월 하켄크로이츠 국기가 유일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또한 나치당의 노래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가 독일의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600만 명이 실업 상태였고 무역의 적자 수지가 엄청나서 경제 상황이 심각했다.[34] 정부가 적자 지출을 감수하면서 1934년부터 공공 사업 프로젝트를 시행하여 같은 해 말까지 170만 개가 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고,[34] 평균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했다.[35]
권력의 강화
돌격대의 지도부는 더 큰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원했으며 점점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응하여 히틀러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과 게슈타포(Gestapo)를 활용하여 돌격대 지도부 전체를 숙청했다.[36] 히틀러는 돌격대 참모장(Stabschef)인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돌격대 지도부와,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정치적 반대파를 함께 체포하여 총살시켰다.[37] 나중에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으로 인해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대 200명의 돌격대 지도자들과 정치적 반대파 정치인들이 사망했다.[38]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이전에 나치당은 〈독일국의 국가원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 법률에 따라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국가의 대통령 직책이 폐지되고 그 권한이 총리와 합쳐져야만 했다.[39] 이 법률로 히틀러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지도자 겸 국가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이라고 명명되었지만 결국 총리 직위는 폐지되었다.[40] 이로써 독일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한 전체주의 독재 국가가 되었으며,[41] 독일군의 최고사량권 역시 그가 되었다. 새로운 법률은 군인들에게 퓌러에 대한 총성 맹세를 요구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들의 최고사령관이나 국가가 아닌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했다.[42] 8월 19일 대통령직과 총리직의 통합은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0%가 찬성했다.[43]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시대의 갈등과 시가전이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과 마르크스주의가 없이 통일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풍요를 약속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요제프 괴벨스와 대중계몽선전국가부의 조직된 선전에 휩쓸렸다.[44] 나치당은 혁명 초기의 활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정당화했고, 그 다음에 법적 매커니즘을 조작하고 경찰권을 동원하여 국가와 연방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화했다.[45][46]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는 1933년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다하우에 지어졌으며,[47]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규모와 기능이 다양하게 수백 개가 넘는 이러한 종류의 강제 수용소가 건설되었다.[48]
1933년 4월부터 유대인의 지위와 권리를 재정의하는 수많은 조치가 시행되었으며,[49]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의 기본권을 박탈한 1935년 뉘른베르크법으로 절정에 달했다.[50] 나치당은 유대인에게서 재산, 비유대인과의 결혼권, 많은 직업 선택권을 빼앗았으며, 최종적으로 유대인을 독일 사회 내에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언했다.[51]
군비 증강
나치 정권 초에는 독일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국방력은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소련 등 주변 주요 국가들은 모두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폴란드는 프랑스에게 독일의 성장을 꺾기 위한 예방 전쟁을 독일에게 선포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시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독일이 발칸 반도와 오스트리아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 지방들을 이탈리아의 핵심 요충지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933년 2월에는 히틀러가 공식적으로 재무장을 시작하여야만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 독일은 점차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들을 위반하기 시작하였고, 그 해 5월 17일에는 국회에서 세계 평화를 바란다고, 또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만일 유럽의 타 국가들이 무장을 해제한다면 독일도 무장을 풀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당연히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를 거부하였는데, 이에 히틀러는 10월에 국제 연맹과 세계 군비 축소 회의에서 탈퇴하였는데, 주 이유는 오직 독일에게만 적용되는 재무장 금지 원칙은 불평등하다는 이유였다. 그 해 11월에 치러진 국민투표에서는 95%의 국민들이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를 지지하였다.
1934년에는 히틀러가 군대 지휘관들에게 최소한 1942년에는 동부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약 15년 간 국제 연맹의 통치 하에 있던 자를란트주는 1935년 1월에 주민투표를 열어 독일에 편입되기로 합의하였다. 1935년 나치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였으며, 독일 재군비 선언에 따라 불과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독일의 병력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또 군수업자 프리츠 토트(Fritz Todt)의 책임 아래 미국의 뉴딜 정책을 모방하여 대규모 공공 사업을 계획하여 다임러 벤츠(Daimler-Benz)나 크루프(Krupp),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 등 군수 산업의 확대와 아우토반의 부설 등이 행해졌다. 1935년 3월, 히틀러는 새로운 독일 공군을 창설하였고 독일 국가방위군을 55만 명으로 늘렸다. 한편 영국은 1935년 6월 18일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맺어 독일이 해군력을 증강시키는 것에 찬성하였다. 나치는 경제 정책을 독일 국립 은행 총재와 경제 장관을 겸임한 얄마르 샤흐트에게 위임하였다. 소비재의 수입 제한과 수출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독일 국립 은행은 고액의 융자를 산업계와 개인에게 주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것이 영국과 프랑스의 미온적인 항의를 받는 데에 그치자, 히틀러는 자신이 무슨 일을 벌여도 영국과 프랑스 등의 강대국들이 함부로 제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3천 명의 병력을 세계 대전이후 무장해제 되었던 라인란트 지역에 보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 위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딱히 반응이 없었는데, 이는 라인란트가 전통적인 독일의 영토였고 자국 내정에 간섭하여 전쟁의 위협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월 29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치당은 98.9%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1936년에는 히틀러가 일본 제국과 방공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동맹 협정을 맺었다. 이후 이 협정은 '로마-베를린 축'이라고 불렸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자인 프랑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군사적으로, 물적으로 지원하였다.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이 내전에 참전하였는데, 이 군단은 1937년에 도시 게르니카를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참사를 저질렀다. 1939년에 이르자 프랑코가 이끄는 군대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스페인은 나치 독일의 비공식적인 동맹으로 자리잡았다.
1938년 2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총리 쿠르트 슈쉬니크에게 서서히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후 슈쉬니크 총리는 국민투표를 실시, 독일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오스티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이 것이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렸고 히틀러는 3월 11일에 오스트리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어 만일 총리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권력을 이양하지 않는다면 즉시 군대를 보내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총리는 이에 굴복하였고, 결국 12일에 독일 군대가 오스트리아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에 입성하였다. 이를 오스트리아 병합이라고 한다.
한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는 상당한 수의 독일인들이 주데텐란트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 곳의 독일인들이 점차 분리주의 활동을 벌이며 독일에 편입되려 시도하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경제적 이권을 주어 분리주의 운동을 막으려 하였다.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 뿐만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멸망시켜 독일에 합병시킬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치당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선전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체코슬로비키아 병합 계획을 노골화하였다. 다만 군부 최고 간부들 몇몇은 이 병합을 반대하였는데, 이는 아직 독일이 대규모 전면전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이 이같이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는 점차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뮌헨 협정을 맺는 등 여러 협상들을 중재하였다.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게 주데텐란트 지역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이 협정으로 평화가 도래했다고 여겼기에, 체임벌린 총리가 런던으로 돌아갔을 때에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배제되었던 이 회담의 결과에 굴복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에 주데텐란트를 할양했을 뿐만 아니라, 헝가리와 폴란드에도 인종 지도에 따라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과 루테니아, 테신 등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 이후 제2공화국이 선포되고,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물러나고 에밀 하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주데텐란트를 빼앗긴 체코슬로바키아는 더 이상 독일에 대항할 능력이 전무했다. 주데텐란트에는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국경 요새가 건설되고 확장되어 소(小)마지노라고 부를 만한 수준에 이르렀었는데, 이것을 모조리 빼앗긴 체코슬로바키아는 사실상 나치 독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른바 통일당이라는 것을 유일 집권당으로 삼아 독재정권화하고, 중앙은행의 준비금을 베를린으로 옮기는 등,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나치에 완전히 종속되어 독립국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 때를 틈탄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로 국가가 개편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데텐란트를 복속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나치 독일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을 사주, 이용하고 이들이 체포되자 즉시 군대를 움직여 슬로바키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마저 병탄했다. 이후 슬로바키아를 분할시켜 1939년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괴뢰 국가를 성립시키는 한편 나머지 영토는 형식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계승하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설치했다. 후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결성되어 영국의 도움을 받아 연합국에 가담하여 추축국에 대항하였다.
폴란드
1934년 1월, 독일은 폴란드와의 우호 협정을 맺었다. 1939년 3월에는 히틀러가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국을 잇는 단치히 회랑과 단치히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영국은 만일 독일과 폴란드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폴란드의 편에서 함께 싸울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이 말로만 떠들뿐 실제로 행동에는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고, 1939년 9월 쯤에는 공격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전 작업에 착수하였다. 5월 23일, 히틀러는 그의 장군들에게 그의 목표가 단순히 단치히 회랑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 전체를 합병하여 독일의 영토를 크게 넓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만큼은 그도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독일은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재확인하였고, 덴마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과 협상을 벌여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1939년 8월에 독소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와 발트 국가들은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에 나누어 편입한다는 내용도 함께 들어있었다.
사회 정책
나치는 인종주의 정책을 펼쳐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하였으며, 인종적·사회적·문화적 청정을 요구하며 사회의 모든 요소에서의 정치적 지배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유대인과 집시 등의 소수 민족과 동성애자와 장애인 등의 불결하다고 여긴 사람들, 즉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한 철저한 박해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다.
독일의 전시 외교 정책은 주로 동맹국 정부들을 베를린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데에 있었다. 독일은 이탈리아나 헝가리와 같은 동맹들에게서 군인들을 데려왔으며, 비시 프랑스와 같은 괴뢰국들에게서 노동력과 식량을 공급하였다. 헝가리는 1940년 9월 27일에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며 독일이 주도하는 추축국 세력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불가리아가 11월 17일에 추축국으로 들어왔다. 독일은 석유 공급을 원할히 하기 위하여 11월 23일에 루마니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였고, 이와 함께 슬로바키아 공화국도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다. 1942년이 되자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통치하였으며 이탈리아는 1943년에, 헝가리는 1944년에 거의 완전히 장악하였다. 추축국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였던 일본 제국은 상당히 강력한 나라들 중 하나였으나,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독일과의 인적, 물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연히 양국 간의 우호도도 낮았는데, 일례로 독일은 전쟁 말기에 석유와 석탄을 일본과 공유하기를 거절한 적도 있다.
개전
나치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빼앗긴 구 독일 제국령에서 프로이센의 반환,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과 관계없이 1921년에 폴란드인들의 반란으로 빼앗아간 서부 폴란드 회랑, 남부 슐레지엔의 반환을 폴란드에게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소련과 반씩 분할 점령하였다. 이에 대해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2일 후에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보안방첩부와 게슈타포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9월 21일에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철도가 발달된 도시들로 모여 살게 하였다. 아마도 이들을 마다가스카르와 같은 머나먼 곳으로 강제로 보내버릴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치 독일은 미리 준비해 둔 살생부를 가지고 65,000여 명에 달하는 폴란드 지식인, 귀족, 선생, 교수들을 사로잡았으며, 1939년 말에 이들을 모두 살해하여 폴란드의 국가 정체성을 없애버리려 하였다. 한편 소련의 군대가 겨울 전쟁으로 핀란드로 진군하였고, 독일은 해군 활동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다만 다음 해 5월까지는 별다른 대규모 군사 활동이 이루어지기 않았기에, 이 시기를 가짜 전쟁이라고 부른다.
개전 직후, 독일은 영국에 의하여 해상 봉쇄를 당했고,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독일은 국제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석유, 석탄, 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봉쇄 조치 때문에 독일로 들어오는 수입량이 80%나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히틀러는 스웨덴에서 들여오는 철광석의 보급로를 지키기 위하여 베저위붕 작전으로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하였다. 덴마크는 하루도 안되어 독일에 항복하였고, 노르웨이 대부분도 1달도 안되어 독일의 손에 떨어졌다. 1940년 6월에 이르자 독일은 노르웨이 전부를 장악하였다.
유럽 정복
히틀러는 고위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0년 5월에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을 공격하였다. 독일은 빠른 속도로 낫질 작전으로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를 장악하였고, 벨기에에 주둔하던 연합국 군대를 쫒아내고 됭케르크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쫒아낸 이후에는 프랑스도 6월 22일에 독일에게 항복하였다. 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에게 큰 수모를 안겨주었던 프랑스를 꺾은 것으로 인하여 독일 대중들은 히틀러를 크게 지지하였으며, 독일은 점점 더 전쟁에 미쳐돌아갔다.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산업 지대는 모두 독일의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굼하였다.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철도, 기관차, 무기 등을 강제로 압수하여 갔고, 구리, 주석, 석유, 니켈과 같은 금속들도 가져가 자신들의 군수물자로 사용하였다. 독일은 엄격한 무역 장벽들을 세워 점령지 간 무역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이로 인하여 암시장과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 식량난도 심각해져 갔는데, 나치가 점령한 유럽 지역 대부분에서 식량 생산량이 큰 폭으로 감소하고 기근이 종종 발생하였다. 또한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겼던 베르사유 조약 원본과 프랑스에서 암약중인 레지스탕스 명단도 잇따라 압수하였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게 내주었던 알자스 로렌 지방을 점령하여 독일 영토로 지정하였다.
한편 영국에서 새롭게 총리에 오른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거절하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할 태세를 취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의 제독 에리히 레더는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공군력이 필요하기에 미리 공습을 벌여 선수를 칠 필요가 잇다고 히틀러에게 조언을 넣었다.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였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벌여 영국 공군의 기지들과 비행장들에 대대적인 폭격을 벌였다. 또한 런던, 플리머스, 코벤트리와 같은 영국의 주요 도시들에 대규모의 야간 공습을 실시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허나 독일 공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였고, 10월 말쯤에 이르자 히틀러도 영국을 공군력에서 이기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결국 영국 본토 침략을 무제한 연기하였으며, 이로써 영국은 나치의 마수로부터 안전하게 되었다. 다만 몇몇 역사학자들은 독일이 영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영국 공군의 힘이 아니라 영국 해군의 상대적 우월성 때문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41년 2월,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이 북아프리카 전역의 이탈리아 군대를 돕기 위하여 리비아에 상륙했다. 4월 6일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이 두 나라들은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에게 쪼개져 먹히게 된다.
소련 침공
1941년 6월 22일에는 독일이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380만 명의 추축국 군대를 동원하여 소련을 공격하였다. 이를 바르바로사 작전이라고 칭하는데, 이 작전의 최종적인 목표는 소련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러시아의 상대적으로 풍부한 천연자원을 강탈해오는 것이었다. 당시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은 놀람과 회의, 이 2가지로 갈렸는데 이는 아무리 독일이더라도 2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전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침공 직후 막대한 영토를 빼앗았다. 독일은 발트 지방,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부를 강탈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1941년 9월에 승리하자 히틀러는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있던 중부 집단군에게 진군을 멈추고 레닌그라드와 키예프의 포위 공격을 도우라고 명령하였다. 독일군의 물밀려들어오는 듯한 공세가 일시적으로 멈추자, 소련의 붉은 군대는 대대적으로 전열을 정비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모스크바 전투가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결국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와중에 일본이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였고, 4일 후에는 독일도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소련의 전선 지대에서는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졌다. 후퇴하는 독일군들은 상당량의 곡물들을 적이 쓸 수 없도록 불태웠고, 남아있는 것들 대부분도 독일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점차 식량난이 가중되어 배급량이 줄어들었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헤르만 괴링은 프랑스에서 더많은 곡물을, 노르웨이에서 더 많은 생선을 실어오라고 명령하였다. 1942년의 작황은 상대적으로 풍년이었고, 이에 힘입어 서유럽의 식량 공급 상태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당시 독일과 유럽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독일은 불안정한 석유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6월에 청색 작전을 벌여 코카서스 지방의 유전을 차지하려 들었다. 한편 소련은 11월 19일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고, 11월 23일에는 추축국 군대를 스탈린그라드에 몰아넣어 포위하였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이들이 공군을 통하여 보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독일군은 굶어죽어가기 시작하였다. 상황을 제대로 모른 히틀러는 후퇴를 거부했고, 결국 20만 명에 달하는 독일과 루마니아인 군사들이 사망했다. 1943년 1월 31일에는 도시 안에 남아있던 91,000여 명이 항복하였다. 오직 6천여 명의 병사들만이 전쟁이 끝나고서야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를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부른다.
붕괴
나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에도 점차 연이은 패배를 맛보았다. 이렇게 되자 독일 내에서도 나치당의 지지율은 크게 추락하였고, 사회에는 불순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소련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1943년 여름에 승리한 이후에도 동부 전선에서 연승하며 독일군을 수세로 몰아넣었고, 1943년 말에 이르자 독일은 한때 자신들이 점령했던 동부 지역을 모두 잃게 되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이 1942년 10월에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배하며 독일은 점차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43년 7월에 연합국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였고, 그 해 9월에는 이탈리아에도 상륙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 방공전을 벌이며 독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이 공습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죽으며 독일 내부에서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독일은 새로 생산해내는 비행기보다 훨씬 많은 비행기들을 잃으며 공군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방공력이 사라지자 연합국의 공습은 독일 본토에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연합국은 특히 독일의 공장과 정유소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고, 1944년 말이 되자 독일은 더이상의 전쟁 물자 공급도 어렵게 되며 패색이 만연해졌다.
1944년 6월 6일, 미국, 영국, 캐나다 연합군이 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하면서 프랑스에 새로운 서부 전선을 구축하였다. 1944년 7월 20일에는 히틀러가 암살 미수를 당했고, 그는 이 미수 사건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7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4,900여 명의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1944년 12월에 발생한 벌지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독일이 벌일 수 있었던 마지막 주요 방어전이었고, 독일은 이마저도 패배했다. 소련은 1945년 1월 17일에 독일 본토에 들어왔다. 상황이 이런데도 히틀러는 패배를 시인하기를 거부하였고, 독일의 최후의 사람까지 모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는 전쟁을 길게 끄는 결과를 낳았고 겨로가적으로는 수많은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낳았다. 히틀러는 당시 법무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에게 독일인들 가운데에서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처벌하라고 일렀고, 이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음에 몰아넣어졌다. 독일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나치 간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진군해오는 엽합국들에게 항복하였다. 히틀러는 초토화 작전을 벌여 모든 다리, 도로, 산업, 기반 시설들을 파괴하여 이후 연합국이 쓸 수 없게 만들라고 지시하였으나,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노력 덕에 이 지시가 완전히 이행되지는 않았다.
1945년 4월 16일에 발발한 베를린 전투에서, 히틀러와 고위 내각 관료들은 소련 군대가 진군하는 동안 지하의 벙커에 대피하여 있었다. 4월 30일에는 소련 군대가 히틀러의 집무실인 국가수상부에서 2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군하였고, 결국 히틀러는 그의 여자친구이자 아내인 에바 브라운과 자결하였다. 5월 2일, 헬무트 바이틀링이 결국 소련에게 무조건 항복하였고, 히틀러의 자리는 카를 되니츠가 승계하여 대통령직을 맡았다. 또한 괴벨스는 총리직을 맡았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는 바로 다음날 6명의 자식들을 죽인 후 자살하였다. 1945년 5월 4일에서 8일 사이에 대부분의 잔존 독일군 세력들이 항복하였고, 5월 8일에는 독일 항복 문서가 서명되며 나치 정권과 유럽에서의 제 2차 세계대전을 끝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이미 독일 내에서 히틀러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특히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군하던 동부 전선 지방에서 독일인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치솟았는데, 이는 보통 군인들이나 당 간부들이 자살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치가 소련 군인들을 야만적이고 거친 존재로 묘사했기에, 강간을 두려워한 독일 여성들이 대거 자살했던 것이다. 독일의 한 소도시에서는 1945년 5월에 소련의 군대가 쳐들어와 대규모 강간, 대학살, 방화를 저지르자 16,000여 명의 인구 가운데 수천 명이 자살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 외 독일 지방에서도 자살이 만연하였고, 특히 베를린에서는 최소 7,057명의 사람들이 자살을 택했다.
전후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독일 본토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독일은 옛 영토의 3분의 1을 잃었다. 대부분은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었고, 전쟁중에 점령하며 독일 영토로 지정했던 알자스 로렌 지방도 다시 프랑스로 환원되었으며 동프로이센의 반은 소련에 병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오히려 소수 민족이 된 약 1,000만 명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서쪽 점령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되었으며, 소련의 동쪽 점령 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되었다. 한편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병합된 오스트리아는 1945년 소련에 점령되었다가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한다.
그 외에도 히틀러가 고용한 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레니 리펜슈탈이나, 나치 고관이었던 애인의 비호 아래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코코 샤넬, 나치의 적극적 협력한 지휘자 카라얀 등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에 가담한 예술가나 실업가 등도 전후 국적을 불문하고 죄를 추궁당하여 대거 활동이 금지되었다. 전범 처벌은 유명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행해졌으며 프랑스의 경우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전부 잡아다 남자는 총살시키고 여자는 삭발 후 속옷 바람으로 조리돌림을 시킨 후 태형에 처했다.
모든 반파시스트 유럽 국가에서는 나치 및 파시스트의 구성원을 처벌하는 법률이 확립되었으며, 종전 전에 도주한 사람들도 국제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어 결국은 체포되어 처벌되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나치당 출신으로 외무부에서 일했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잠시 총리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등 당시 지식인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2년만에 총선에 패배하여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대학살
나치당의 주요 강령은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에 그 근간을 두고 있었으며, 이들은 나치 정권 내내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수많은 만행들을 저질렀다. 당시 나치 독일은 독일의 아리아 인종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었고, 이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열등한’ 민족들과 섞여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다. 나치당은 순혈 아리아인의 가치를 강조하였고, 유대인, 황인, 집시, 흑인과 같은 민족들이 만일 아리아인들과 섞여살 시에는 사회가 문란해지고 백인들의 유전적 우월함이 퇴보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유대인 탄압
나치당은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돌격대 단원들은 유대인들의 사업과 시나고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고, 1933년 4월 1일에는 히틀러가 직접 모든 유대인 사업들을 보이콧할 것을 명령하며 유대인의 경제 활동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4월 7일에 통과한 공무원법에 의하여 모든 비아리아인 공무원들은 강제로 퇴직해야만 하였고, 곧이어 유대인들도 교수, 선생, 공무원 등이 될 수 있는 권리들을 박탈당했다. 4월 11일에는 이 규제가 더욱 확장되어, 만일 3대 안에 유대인 혈통의 가족이 1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순수하지 못한 아리아인으로 간주되는 내용의 법이 발효되었다.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아리아인이 쓰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빼 없애버렸고, 5월 10일에는 대대적으로 이 책들을 불태워버리는 짓을 하였다.
나치 정권은 폭력과 경제적 압박을 동시에 가하며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독일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유대인들의 사업체는 시장 진출도 불가능해졌고, 광고도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며 정부간 접촉도 제한되었다. 유대인 시민들은 항상 공포에 떨며 살아야했으며, 언제나 폭력의 위협 속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독일 시민들도 이같은 반유대정책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많은 마을들의 입구에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팻말이 나붙었다.
1938년에는 한 유대인 청년이 파리의 독일 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고,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하여 당 간부를 총으로 쏴 죽였다. 나치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돌격대원들은 시나고그를 점령, 파괴하였으며 유대인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국고로 귀속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최소 91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유대인의 가게 유리창이 깨져 수정처럼 길바닥에서 빛났다고 하여 이 사건을 ‘수정의 밤’이라고 부른다. 1939년 즈음에는 437,000여 명에 달하던 독일 거주 유대인들 중 250,000여 명이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 팔레스타인 등으로 도피하였다. 다만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유럽 대륙 내부에 있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유럽 대륙 외의 다른 국가로 이동할 경우에는 모든 재산을 압수당하고 홑몸으로만 이동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집시 탄압
나치 당은 유대인들과 함께 롬인, 즉 집시들도 크게 탄압하였다. 집시들은 독일인들과 혼인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1935년부터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상당수가 죽음을 당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2,500여 명에 달하는 집시인들이 독일에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나중에는 5,000여 명의 인원이 1941년 후반에 게토로 보내졌고, 이들 중 절반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토에서 살아남은 집시족들은 헤움노 절멸 수용소로 보내졌고, 결국 대부분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나치는 모든 집시족들을 독일에서 쫒아내고 싶어하였으며, 히틀러는 1942년 12월에 모든 집시들을 공식적으로 독일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23,000여 명에 달하는 집시들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19,000여 명이 사망했다. 독일 밖 나치 점령지에서는 집시족들이 대부분 강제 노동에 글려갔고, 그 중에서도 다수가 사망했다. 발트 국가들과 소련에서는 독일군, 게슈타포에 의하여 30,000여 명의 집시들이 잡혀 죽었으며, 세르비아에서는 12,000여 명의 사람들이 독일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에서도 25,000여 명의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날 당시 총 220,000여 명의 집시들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 유럽 전체 집시족의 25%에 달하는 수였다.
T4 작전
나치는 T4 작전을 펼쳐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들은 정신병동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며, 이 작전은 대략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주로 시행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초기 나치는 이들을 총살하여 죽였으나, 1940년대 초부터는 가스실을 이용하여 이들을 살해하였다. 1933년 6월 14일에는 '유전적 장애인 방지법‘이 통과되어 40만 명에 달하는 일반인들이 ’살균‘ 작업을 거쳤다. 이들 중 대략 절반은 정신적 장애가 있다고 판정받은 이들이었는데, 단순히 지능이 낮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성애, 위생적으로 불결한 자들도 포함되었다. 또한 노숙자, 범죄자와 같은 사람들도 함께 수감되었다. 나치당은 여호와의 증인, 사회적 부적격자, 정치, 종교적 야권 세력들도 모두 탄압하여 죽이는 경우가 흔했다.
홀로코스트
1941년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할 무렵, 히틀러는 유럽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도 유대인 시민들이 폴란드나 소련의 나치 점령지에서 학살되고 있었는데, 히틀러가 이처럼 대대적인 학살을 공언한 이후에는 본격적인 대참사가 시작되었다. 반제 회담에서 히틀러는 1,1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모두 유럽 내에서 제거할 것을 공식화하였고, 이로 인하여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강제 노동을 하다가 탈진으로 사망하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절멸 수용소로 끌려가 살해당하였다. 초기에는 나치가 총살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죽였으나, 나중에는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수용소에 가스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후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 등에서 가스실들이 대거 만들어졌고, 대략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이들 중 100만 명은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을 홀로코스트라 칭한다.
과학기술
나치독일은 군사력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고 유능한 과학자들에 의해 세계최고의 과학기술을 개발, 보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에 비해서 우위의 과학기술(당시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 V-1 로켓과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로켓과 그 외에도 여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였거나 설계하였다.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 Heinkel He280을 개발하였다. 프로토타입이 시험비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최초의 양산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도 있다. 세계최초의 스텔스 항공기 Horten Ho 229 전익기를 개발하였고 세계 최초로 램제트 엔진을 개발하였다. 여러 종류의 제트 전투기들도 개발하거나 계획하였다. 세계최초의 지대공미사일 Fliegerfaust(Luftfaust) Surface-to-Air Unguided Missile, 세계 최초의 공대공 유도 미사일 Ruhrstahl/Kramer X-4, 세계최초로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개발되고 무선으로 조종되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공대공(AAM)미사일 Luftkampfrakete Henschel Hs 298, 최초로 실용화된 공대공 로켓 Brodrakete R4/M "Orkan"(Hurricane, 허리케인), Wgr 21(Wurfgranate 21) 210mm 로켓탄(쉽게 말해 다연장 로켓탄을 전투기에 장착하였다.), Jagerrakete X4(Fighter Rocket X4)를 개발하였다.)을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전시상황과 경제적 한계에 의해 무기를 개발하는데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다. 전세가 역전되어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연합군에 협력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치독일의 과학기술은 미국, 구 소련 등에 전파가 되었으며 현대 과학기술에 큰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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