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세는 카를 루트비히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차남 오토 프란츠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1865~190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종조부였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뒤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 또한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분이 낮은 여성과 귀천결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자식들에겐 제위 계승권이 없었다. 결국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이 합스부르크의 상속자로 책봉되었다.
카를 1세는 평화주의자였는데, 유럽의 각국들과 협상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하려했지만, 이탈리아에게 조금도 영토를 내주려하지 않아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권리 주장을 옹호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신망을 잃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각 민족들은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아 분리 독립을 열망했는데,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연방 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대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의 여러 신생 국가로 분할됐다.
1918년 11월 16일 그는 오스트리아의 모든 정무에서 손을 떼었고, 1919년에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그 후 오스트리아 의회는 그를 폐위시켰다. 그 후 헝가리의 국왕 복위를 2번 시도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의 반대,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의 반대와 비협조에 의해서 실패하고, 결국 그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제도에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지난날 오스트리아에 지배당했던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2004년 10월 3일 복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