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복 전투

서울 수복 전투
6.25 전쟁의 일부

서울 수복 전황도
날짜1950년 9월 20일 ~9월 25일/9월 28일
장소
서울 및 서울 인근 지역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유엔의 기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서울 수복, 제2차 서울 전투(Second Battle of Seoul) 또는 9·28 서울 수복(九二八 ── 收復)은 6.25 전쟁의 전투 중 일부로,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9월 28일까지 서울 수복을 위해 치러진 전투이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서울 공격은 예상보다 느렸다.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서울로 증원군을 보내고 남쪽에서 병력을 철수할 시간을 벌려고 했다.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대한민국 정부에 서울을 수복하겠다는 약속을 빨리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미군 제7보병사단을 태운 함선들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바 장군은 사단을 지휘하여 적이 서울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고 싶어했다. 9월 18일 아침,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제2대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그날 저녁 나머지 부대도 상륙했다. 다음 날 아침, 제2대대는 서울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가 점령한 거점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제7보병사단 제31보병연대도 인천에 상륙했고, 9월 19일 오후 6시에 제7보병사단은 서울 남부 도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단은 서울 남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전에 인민군은 서울에 전투력이 약한 사단 하나만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그 사단은 대부분 서울 남부를 방어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제1해병연대가 서울로 가는 길에서 조선인민군과 싸우는 것을 직접 지휘했으며, 크로마이트 작전의 지휘권은 미 제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니드" 알몬드에게 넘겨졌다. 알몬드의 목표는 9월 25일까지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전쟁이 발발한 지 꼭 3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9월 22일, 미국 해병대는 서울로 진입해 강력한 방어 거점을 찾았으며, 가옥 하나하나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서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서울의 수복을 서둘러 선언하고 싶어 한 알몬드는 9월 25일에 서울이 해방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완전히 서울을 수복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서울 교외에서는 확보한 서울을 방어하고 서울 인근의 적을 탐색하는 작업이 10월 초까지 이어졌고, 10월 2일부터 3일까지 의정부 일대에서는 조선인민군과 미군 간에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이 완전히 수복된 이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인천 상륙 작전과 병행해 9월 16일부터 공세를 시작했고 9월 22일 대한민국 국군은 일부 지역에서 방어선을 돌파했다. 공세를 지속한 낙동강 주둔 유엔군은 9월 27일 옥천을 점령한 뒤 대전을 탈환했고, 같은 날 미국 제8군미국 제10군단은 공세를 지속해 오산에서 만났다. 서울 수복 및 기타 지역에서의 공세가 완료된 이후 1950년 10월부터 유엔군은 북한으로의 공세를 지속하게 된다.

같이 보기

각주

관련 도서

  •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년. ISBN 978-89-3647-596-3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