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세계 1위 면적과 세계 9위 인구(1억 4200만명), 국내총생산(GDP) 1조 4200억 달러의 세계 12권 경제대국으로 거대한 내수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광물, 보석, 희토류, 목재 등의 보유량이 세계 1위이며, 천연가스 생산량과 원유 생산량은 세계 1위이다.
러시아는 남북 이중 수교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해방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며,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냉전 이후,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엔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잠재되어 있는 녹둔도 문제를 포함해서 연해주 등의 잠재된 영토 문제가 아직 남아 있으나 남북분단으로 인해 쟁점화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도 러시아의 기술적 협조로 제작 및 발사했다. 현재 약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으며 2014년1월 1일부터 러시아와 한국사이에 무비자협정이 시행되고 있다. 김남일을 비롯한 여러 축구 선수들이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바 있었으며 이성남 (러시아명 데니스 락티오노프)을 비롯한 러시아 출신의 축구 선수들이 K리그 클래식 (당시 이름은 K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러시아 제국은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연해주를 획득했으며 20세기에는 청나라에서 독립한 투바 공화국을 획득했다. 잠시 국경 분쟁이 발생되었지만 1990년대 협정으로 잠잠해졌다. 예전엔 청나라에 속했으나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로 들어간 일부 지역(강동육십사둔 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지만, 중화민국은 연해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중화민국의 공식 영토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2005년에 중국과 러시아는 헤이샤쯔섬의 서쪽은 중국령, 동쪽은 러시아령으로 합의했다.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예로부터 몽골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17년 이후에 한때 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 휘말렸을 때,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몽골은 정부형태를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당시에 백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을 때, 소비에트 연방이 적군을 몽골에 지원을 해주어 백군을 물리쳐 승리를 차지하였기도 하였으며, 이후 몽골은 구 소련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할 때 구 소련을 즉시 지원하였다. 1992년에 몽골이 민주주의로 전환되고 소련이 해체되었지만 러시아와는 지금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러시아 제국 시대로 거슬러간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대체로 적대적인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두고 양국은 러일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만주 일대를 장악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과의 국경 분쟁이 잦아졌고, 이는 1939년할힌골 전투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패배하였으며 소련이 원하는 국경선을 골자로 하는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전세가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만주를 침략하였다. 소련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미나미가라후토와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보리스 옐친 정부가 들어섰다. 그 후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의 분쟁 지역을 되찾겠다는 방침을 확실히 하였다. 비록 일본이 G7 국가에 가맹하였고 러시아에 기술 및 재정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이들 사이의 관계는 안 좋다. 1992년9월 보리스 옐친은 일본 방문 계획을 연기했고, 1993년 10월에 방문했다. 그는 쿠릴 4도 분쟁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지만, 1956년에 소련이 체결한 시코탄 및 하보마이 섬을 되돌려 주기로 했던 조약을 이행하기로 하였다. 옐친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포로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1994년3월, 하타 쓰토무 일본 외무성 장관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성 장관 및 다른 장관을 만났다. 이 두 나라 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쉽게 해결되기가 어려워 보인다. 비록 영토 분쟁이 있었지만 하타 장관은 러시아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2009년 5월 6일 양국은 사할린-1 가스전 개발계획에 전격 합의했다. 천연가스의 20%를 러시아 국영 가즈프롬사에 매각하기로 했다. 원유 23억배럴, 천연가스 4850m3가 매정돼 있는 사할린-1 가스전 개발사업은 일본의 이토추상사, 마루베니 등과 미국의 엑슨모빌 등이 공동으로 출자했으며 오는 2012년부터 본격 개발하며, 일본 가스 수입량의 약 10%를 사할린 가스전으로부터 들여오게 될 것이다.[1] 현재 일본과 러시아는 일본항공과 아에로플로트만 들어오고 있다.
벨라루스와 러시아는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긴밀한 무역 파트너이자 외교적 동맹국으로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러시아와는 독립 직후에 1992년에 수교를 맺었다. 특히 벨라루스의 알략산드르 루카셴카 대통령이 친러파 성향을 보이고,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 그리고 유라시아 경제 연합에도 창설에 합의했다.
1848년에 코슈트의 주도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나,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 의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한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헝가리는 1956년 10월 23일 발발한 1956년 헝가리 혁명에 의하여, 10월 24일 수상으로 임명된 임레 너지는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군이 개입, 임레 너지를 사형시키고, 반공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냉전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도 외교관계가 끊어지는 일은 없었고, 양쪽 모두 대사관을 두었다. 1969년 "아시아 각국은 내란이 발생하거나 침략을 받는 경우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969년 1월 닉슨 행정부가 수립된 후 미소관계는 상호협조의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강조한 닉슨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협상시대의 도래를 희망한 후 곧이어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서구 우방을 순방했다.(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 대통령은 대소협상에 관한 사전 의견교환을 하고 방소 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2] 소련 해체 이후,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협력관계에 속해 있다. 부시시절엔 갈등이 심했으나, 오바마가 당선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다. 최근 일어난 시리아내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는 갈등을 빚고 있으며, 터키와 시리아 간 포격전으로 인해 갈등을 빚고 있다.[3]
녹둔도: 원래는 조선에 속했던 영토였으나, 베이징 조약 때 연해주가 러시아령으로 넘어감과 동시에, 녹둔도는 자연스레 러시아령이 되었다. 잠시 분쟁이 일어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잠잠한 상태이다. 하지만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재조약을 맺으면서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로 들어갔다.
기타: 1960년대에 중국과 잠시 중소 국경 분쟁이 일어났지만, 1991년5월 16일에 체결한 중소 국경 협정으로 헤이샤쯔섬의 서쪽은 중국이, 동쪽은 러시아의 영토로 분할되었다.
발해: 러시아는 발해사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은 인정하나, "속말말갈족이 포함되어 있다"라는 점을 들어 발해사를 러시아 소수민족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부록
출처
↑조르주 뒤비 (2006). 《지도로 보는 세계사》. 채인택 옮김. 생각의 나무. 199쪽. ISBN89-8498-618-6. 1600 ~ 1601년 왈라키아 대공인 용담공 미하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으리 기점으로 분리된 루마니아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통일을 실현했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의 상반된 야망의 희생자였다. 두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의 약화와 크림 전쟁을 활용하여 1858년 진정한 자치권을 획득한다.
↑“이것이 미국이다<46> 외교 - 對蘇관계(하)”. 매일경제신문. 1972년 12월 29일. 1969년1월 「닉슨」行政府가 수립된 후 美蘇관계는 相互協調의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강조한 「닉슨」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協商時代의 到來를 희망한 후 곧이어 西独, 英, 伊 등 西歐友邦을 순방했다. (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대통령은 對蘇協商에 관한 事前意見交換을 하고 訪蘇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