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국어: 楚, 병음: Chu, ? ~ 기원전 223년)는 현재의 후베이성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중의 하나이다. 군사력은 갑병 수십 만, 전차 천 승(乘)과 기병 1만 기를 낼 수 있었다. 국성이 미성 웅씨인 주나라의 제후국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비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되며,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다.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원의달)의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있었던 장강(長江) 이남 지역 전체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 등지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백월,민월 출신 남방계 민족으로서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1]
사마천의 사기초세가에 초나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은 창의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은 축융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의 아들이다. 주 문왕 때 계련의 후손 중에 육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초나라 웅씨들의 시조이다.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은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했다. 하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다.[2]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3]으로 정했다.
서주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4]과 양오(楊奧)[5]에서 악(鄂)[6]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웅거는 잠시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서주 여왕이 즉위하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 칭왕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에 웅순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은 가라앉았고,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오, 소오와 분모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있던 당시에 가장 강한 국가인 수나라와 어깨를 겨뤘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초 무왕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7]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송 양공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8]에 소집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9]가 조상인 축융과 육웅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10]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목왕이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3년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초한 쟁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워 초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의제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했고 항우도 한나라유방에게 패망했으며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서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성복대전(城濮大戰), 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 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 문공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 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은 당진이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