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 하여, 응나라의 시조는 실제로 주 무왕의 아들로 주 성왕의 동생인 당숙 우를 시조로 삼는 것이 알려진 진나라와, 시조가 알려지지 않은 한나라 · 우나라와 함께 무왕의 자손으로 주나라 초기에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영천군 항목에서 “부성현, 응향이 있는데, 옛 나라로, 주 무왕의 아우가 봉해졌다.”라는 기록이 있고,[2] 이외 수경주 등의 기록을 통해 옛 응나라의 터는 지금의 허난성핑딩산 시 인근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응후와 관련된 청동기 명문이 세상에 나오면서 응나라의 실존이 명백해졌고,[3] 1970년대에 핑딩산 시 서쪽 약 20 km 떨어진 지역에서 응나라 관련 청동기가 부장된 묘지가 발견되었다.[4] 발굴 보고에서는 이 무덤의 부장품들 중 서주 초기의 것이 있다고 했으나, 김정열은 유의미한 유물들의 연대를 모두 서주 중기 초입부로 추정하고 이에 따라 응후가 핑딩산 시 근방에 봉해진 것이 이때라고 추정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