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 배우로 시작해 성인기까지 원숙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특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보라빛 눈동자는 그녀를 상징하는 특색으로 여겨졌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했으며, 할리우드 황금기의 가장 위대한 영화스타로 손꼽히고 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여성 레전드 목록(AFI's 100 Years...100 Stars) 일곱 번째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또한 지병과 8번의 결혼생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십년 동안 활동해 온 사회사업가로서,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홍보와 연구, 치료를 지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는 영국에 거주했던 미국인 부모 프랜시스 렌 테일러 (1897–1968)와 사라 비올라 웜브롯 (1895–1994)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런던의 햄프스티드에서 태어났고, 당시 집은 런던 북서쪽 교외에 있는 햄프스티드 가든 서버브 지역의 8 와일드우드로였다.[2][3][4] 테일러의 오빠인 하워드 테일러는 1929년 태어났다.[5] 미국인이었지만 영국의 속지주의 국적법에 의해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함께 부여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원래 캔자스주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원래 "사라 소던"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연극 배우로 1926년뉴욕에서 결혼을 하면서 은퇴했다. 이름에서 첫 두 이름은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매리 로즈먼드 테일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3세 때, 테일러는 바카니와 함께 발레 레슨을 받았다. 7세 때 그녀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39년 그녀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뉴욕으로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런던에 남아서 사업을 마무리하고 11월 뉴욕에 도착했다.[6] 그들은 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을 했는데, 그 곳은 당시 사라의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칼럼니스트 헤더 호퍼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부유한 영국 사업가이자 치버 코든의 약혼자였던, 유니버설 픽처스의 회장이자 대주주인 안드레아 베런스를 소개 받았다. 베런스는 사라에게 엘리자베스를 코든에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든은 엘레자베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는 카메라를 잘받아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7]메트로-골드윈-메이어(줄여서 MGM)는 곧 이 영국소녀에게 관심을 나타냈지만, 제작자인 존 콘시다인과 비공식적인 오디션을 본 후에 테일러가 노래를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1941년9월 18일 6개월 계약으로 주급 $100에 계약을 했다.
그녀는 9살의 나이로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에 데뷔를 했고,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유니버설 픽처스의 작품이었다.
아역 배우
10살 때인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다. 유니버설 픽처스와 계약을 통해 그녀는 《명견 랫시의 귀로》(Lassie Come Home)의 영화화를 위한 배역을 구하던 MGM과 7년 계약을 맺는다. MGM과의 첫 작품은 샬럿 브론테의 소설을 영화화한 20세기 폭스의 1944년작 《제인 에어》로, 그녀는 헬렌 번즈 역을 맡았다. 이후 그녀는 다시 MGM사의 영화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같은 해에 1944년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을 찍었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것은 12살 때 찍은 MGM의 영화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에서 맡은 벨벳 브라운 역으로, 그녀가 맡은 벨벳 브라운은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하기 위해 애마를 길들이는 소녀였다. 또한 이 영화는 믹키 루니와 영국의 신인 안젤라 랜스베리를 스타로 만들어주었으며, 1944년 12월 개봉이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테일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일생에서 발생된 많은 건강 문제들은 이때 《녹원의 천사》를 촬영하던 중 입은 척추 부상으로 야기된 것이다.
《녹원의 천사》은 박스오피스에서 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그녀는 3만 달러로 인상된 연봉으로 장기계약에 서명했다. 이 영화로 얻은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테일러는 또 다른 동물 영화 《용감한 래시》(Courage of Lassie)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용감한 래시》의 성공으로 더 인상된 $1,500의 보너스와 주급 $750의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1947년워너브라더스의 작품인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에서는 매리 스키너의 역을 맡았으며, 같은 해 《신시아》(Cynthia)에서는 신시아 비숍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다. 이듬 해 1948년에는 《쥬디와의 데이트》(A Date with Judy)에서는 캐롤 프링글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고, 수전 프랙킷 역을 맡아서 한 《줄리아 미스비헤이비어》( Julia Misbehaves)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테일러는 꾸준한 흥행제조기라는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원샷 리즈"(One-Shot Liz, 한번에 장면을 찍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라는 별명을 얻어 전도 유망한 경력을 쌓았다. 아미의 역할을 한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49)은 그녀의 아역으로는 마지막 배역이었다. 1948년 10월 퀸매리호를 타고 영국으로 가서 《공모자》(Conspirator)를 찍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최초로 성인 역을 맡았다.
성인 연기자
다른 아역 배우들과는 달리, 테일러는 쉽게 성인 연기자로 옮겨갔다.[8]1949년 《공모자》가 나오기 전에 《타임》은 기사를 통해 그녀를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 진정한 스타 사파이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헐리우드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커크 더글라스 그리고 에바 가드너와 같은 차세대 스타로 손꼽았다.[9] 그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는 실패했지만, 남 몰래 공산주의 스파이와 결혼한 21살짜리 연기를 한 16살의 테일러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성숙한 연기로 칭찬을 받았다. 주당 2,000 달러의 새로운 급여조건 하에서 최초로 찍은 《만취》(1950)는 은막의 아이돌 밴 존슨과 짝을 맞춘 영화이지만, 비평가들과 박스오피스에서 모두 실패를 했다. 또한 그 영화는 새롭게 깨달은 그녀의 관능미를 과시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로 스펜서 트레이시와 조안 베넷과 호흡을 맞춰 케이 뱅크스역을 맡아 성인 연기를 한 1950년작 《신부의 아버지》이었다. 이 영화는 후속 편 《아버지의 작은 유산》(1951)을 내놓게 했으며, 같이 연기를 했던 스펜서 트래이스가 “지루하고, 지루했고 .... 지루했다”고 평한 작품이었다. 박스오피스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드라마틱한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게 한 것은 테일러의 다음 영화였다. 1949년말 테일러는 조지 스트븐스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찍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1951년 개봉되자, 테일러는 조지 이스트먼(클리프트)와 그의 가난하고 임신한 여공 앨리스 트립(셸리 윈터스) 사이에 끼어든 망가진 사교계 명사 안젤라 비커스의 연기로 환호를 받았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이 다음 50년 영화 역사를 통틀어 평판을 얻은 고전이라는 평과 같이 그녀의 연기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뉴욕타임즈의 A.H. 웨일러는 "엘리자베스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그녀의 경력에서 최고의 노력이다."라고 썼으며, 박스오피스 평론가들은 "테일러양은 아카데미상감이다."라고 언급했다.
테일러는 그 당시 자기에게 배정된 역할에 점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맨발의 공작부인》이나 《크라이 투마로우》와 같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기를 원했지만, MGM은 그녀의 역할을 카메오나 기억에 남지 않은 영화들, 《Callaway Went Thataway》(1951), 《최고의 사랑》(1952), 《아이반호》(1952), 《모든 걸 다 가진 소녀》 (1953), 《호걸 브롬멜》 등에 배역으로 제한했다. 그녀는 아이반호에서는 로웨나 아가씨 역을 맡기를 원했지만, 그 역은 조안 폰틴에게 돌아갔다. 테일러에게 주어진 역은 레베카 역이었다. 테일러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MGM은 업무 시간을 두 시간 더 늘여 《모든 것을 다 가진 소녀》를 찍도록 그녀를 다그쳤다. 그녀의 임신이 더 진행되기 전에 새로운 영화를 하나 더 찍을 속셈이었다. 테일러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때 그녀는 새집을 막 샀고, 두 번째 남편인 마이클 와일딩과 그녀의 아기 때문에 일은 꽤 빡빡했다. 테일러에게 역이 배당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임신으로 인해 《코끼리 걸음마》(1954년)는 거절당해야 했다. 테일러보다 20살이 더 많지만 닮은 점이 많은 비비언 리는 배역을 가졌고, 로케이션을 찍기 위해 실론으로 갔다. 영화를 찍는 동안 비비언 리는 신경쇄약으로 고생했고, 1953년 1월 첫 아이 마이클 와일딩 주니어를 출산한 후 테일러가 그 역을 대신 맡게 되었다.[10]
테일러의 다음 영화 《랩소디》(1954)는 지루한 사랑 이야기로 좌절을 맛보게 된다. 테일러는 기질이 강한 바이올리니스트(비토리오 개스맨)와 진지한 젊은 피아니스트(존 에릭슨)과 사랑에 빠진 아름답고, 부유한 소녀 루이스 루란트 역을 했다.
《코끼리 걸음마》와 《랩소디》 다음에 찍은 테일러의 4기 영화인 《호걸 브롬멜》에서는 세련된 패트리샤 부인으로 캐스팅되어, 스튜어트 그랜저와 연기를 펼쳤다. 《내가 본 마지막 파리》 (1954)는 이전 작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며, 《숙취》를 같이 찍은 밴 존슨과 같이 연기를 펼쳐다. 헬렌 엘스워스 윌리의 배역은 젤다 피츠제럴드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비록 둘째 아이를 임신했지만, 테일러는 12개월만에 찍는 네 번째 영화에 정성을 쏟았다. 박스오피스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더 나은 배역을 원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0년의 《버터필드 8》과 1966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 수상하여 루이스 레이너, 비트 데이비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비비언 레인, 잉글리드 버그만, 글렌다 잭슨, 재인 폰다, 샐리 필드, 조디 포스터, 그리고 힐러리 스왠크 등과 함께 2회 수상자 반열에 올랐다. 1992년에는 AIDS와 싸우는 작품으로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