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London, 고대 영어: Lunden 룬덴, 라틴어: Londinium론디니움[*])은 영국과 잉글랜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인구는 2014년 기준 8,538,689명으로 영국은 물론 유럽 전체 대도시권 중 가장 큰 권역이며, 음역어로는 倫敦(윤돈)이라 부른다.[주해 1] 런던은 템스강을 기반으로 2,000년 동안 발전해 왔으며 역사는 로마인들이 론디니움이라는 요새를 지은 때부터 시작되었다.[3]시티 오브 런던은 고대 시대부터 런던의 핵심 지역인데, 크기는 1.12-마일(2.9km2)로 중세 시대부터 변하지 않고 있으며 2011년을 기준으로 7,375명이 거주하고 있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작은 도시이다. 적어도 19세기부터 "런던"이라는 용어는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개발된 대도시를 뜻했다.[4] 이러한 광역 도시권의 대부분은 런던 지역[5]과 그레이터 런던으로,[6][주해 2] 런던 시장과 런던 의회에서 통치한다.[7]
런던은 세계적인 글로벌 도시이며,[8][9] 예술, 경제, 패션, 엔터테인먼트, 금융, 의료, 매체, 전문산업, 연구와 개발산업, 관광, 교통 등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 뉴욕과 함께 세계 최고 역할을 하고 있다.[10] 또한 세계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세계의 가장 중요한 금융 지구 중 한 곳으로,[11][12][13] 기관에 따라 세계 도시 GDP 순위 중 5위 또는 6위로 선정된다.[14][15][16][17][18][19] 국제 항공편 승객에 의하면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 중 한 곳이고[20]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여객 수송량을 담당하는 도시 중 한 곳이다.[21]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 43개의 대학이있다.[22] 런던은 1908년, 1948년, 201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현대 도시 중 최초로 세 번의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이다.[23]
기원(起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에 지금의 런던 지역에는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로마인이 43년에 론디니움(라틴어: Londinium)이라는 요새를 건설하며 런던의 시초가 되었다. 200년대 초반 로마인들은 도시에 많은 성벽을 쌓았는데 침입자들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410년에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중세 시대
게르만족의 부족인 색슨족, 앵글족, 주트족이 브리튼 섬의 동부에 정착하여 칠왕국을 세웠는데, 런던은 칠왕국 중 하나인 에식스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당시에 룬덴(고대 영어: Lunden)이라고 불렸다. 800년대에는 덴마크의 바이킹이 도시를 공격하였고, 후에 알프레드 대왕이 런던을 새로 설립하였다.
1000년대에는 앵글로색슨의 왕인 에드워드 참회왕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웠다. 1066년에는 프랑스의 귀족인 기욤 (후에 윌리엄 1세)이 영국을 통치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1세는 런던 시민들을 자치 정부로 승인하였다. 중세기 동안에는 런던의 다른 건조물들이 건설되었는데, 1090년 쯤에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 후에 완공되었다. 1209년에는 런던 브리지가 템스강에 첫 돌다리로 세워졌다. 후에 목제 다리로 변하였다가 가끔씩 재건하였다.
1100년대에는 런던의 공예와 상업의 길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길드는 각각 동업끼리 숙련공과 상인들을 상징하였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1190년대에 런던의 첫 시장을 뽑았다. 1215년에 존 왕이 런던이 자기 뜻으로 통치되는 것을 확립하였다. 역사가들의 주장으로는 1400년대에 런던의 인구가 약 75,000명이었다고 한다.
런던은 1500년대와 1600년대 초기에 빠르게 번영하였다. 헨리 8세의 통치 때에는 귀족들이 장벽들의 바깥인 서쪽에 사유지를 지었다. 헨리 8세가 사망한 154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의회의 회의 장소가 되었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 때 와서 런던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상인들이 부유해지면서, 화려한 집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첫 극장들이 외곽 지역들에서 개장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1600년대 중반에는 런던의 인구는 500,000명이었다. 많은 런던 시민들은 장벽의 밖에 있는 구역들에 살았다.
1642년에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자, 런던은 올리버 크롬웰과 다른 청교도들이 이끄는 의회편 쪽에 섰다. 신앙심이 깊은 청교도들이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자, 런던의 번영은 지속되지 못했다. 크롬웰 정부가 극장들의 문을 닫았고, 이로 인해 시민들의 인기를 잃었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망명으로부터 돌아오자, 런던 시민들은 그를 환영하였고 왕정 복고를 이루었다.
흑사병이 1655년에 도시를 황폐시키기 시작하였다. 쥐들이 빈민가를 들끓면서 도시로 번져가서 생겼는데, 100,000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1666년 9월 2일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다행히도, 사망자의 수는 적었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과 80개의 다른 교회들, 44개의 길드 회관들과 13,000채의 주택 등이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다.
현대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과 벽돌 등을 이용하여 도시를 재건하였다. 새 도시의 위대한 건축인은 크리스토퍼 렌 경이었다. 그는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많은 건물들을 재건하였다. 많은 상인들도 웨스트 엔드로 옮겨갔다. 런던의 비지니스들은 곧 회복되었다. 1700년대 초반에는 런던 증권거래소가 열렸고, 신문업계들도 생겼다.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급속히 성장했으며, 1800년에는 인구가 대략 1,000,000명이었다. 1800년대에는 런던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알려졌다. 산업혁명기 동안의 런던의 주요 역할은 공업 제품을 파는 시장들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도시의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막대한 행운을 만들었다. 부자인 런던 시민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기는 하나, 웨스트 엔드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웨스트 엔드는 유행적인 사회 생활지역으로 유명해졌다. 산업혁명은 런던에 번영은 물론 고통을 끼치기도 하였다. 부두, 공장,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복잡하고 병이 옮는 빈민굴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후에 슬럼 분위기는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1800년대에는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도시의 외딴 지역들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교통의 발달과 함께, 외곽의 번영이 시작되었다. 1750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다리가 세워졌고, 그 후에 수많은 다리들이 세워졌다. 19세기에는 마차가 도시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고, 1800년대 중반에는 철도 서비스가 급격히 발달되었다. 런던 정부의 첫 개혁은 1888년에 세워졌다. 그레이터런던이 그해에 성립되었고, 다음 해에 28개의 자치구가 생겼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 공군이 런던에 폭탄 투하를 한 적이 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런던 대공습으로 보다 더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자, 런던의 수많은 지역이 무너졌고, 15,000명 ~ 50,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망, 1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부상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런던은 재건되어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1946년에는 1차 국제 연합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고, 2년 후인 1948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20세기 동안에 식민지들이 독립되자, 그 나라들로부터 들어오는 이민들이 급증하였다. 2005년에는 2012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되어, 세 번 올림픽을 개최한 첫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런던이라 부르는 지역은 행정구역상 그레이터런던 (Greater London)이라 부르며, 잉글랜드의 아홉 지방 중 하나로 취급된다. 그레이터런던은 런던 대도시권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다.[주 1] 그레이터런던 내에는 시티오브런던 (City of London)이라 해서, 고대에 세워진 런던 도심부의 작은 구역이 또 존재한다. 수 세기를 거쳐 런던 시가지가 시티오브런던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었지만, 시티오브런던의 행정부는 런던시와 그 주변부의 병합에 반대하고 독립체로 남기를 고수해왔기에, 오늘날까지도 그레이터런던과는 별개의 시티오브런던이 존속되고 있다. 이는 '런던'이라는 지명의 범위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28]
영국 우편번호 체계에서 '런던' (LONDON)으로 명명된 우편구역은 그레이터런던 전체에서 약 40% 범위 지역만 관할하고 있다.[29][30] 런던 지역번호 (020)의 경우 그보다는 훨씬 더 넓은 지역을 관할하며 그레이터런던과 엇비슷한 범위지만, 그 역시도 외곽 지역이 포함되지 않거나 그레이터런던 범위 밖의 지역이 들어가 있는 등의 변동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M25 모터웨이의 경로를 따라 그레이터런던의 경계가 조정되기도 했다.[31]
런던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다. 겨울은 춥고 눈은 12월에서 2월 사이에 약 4~5번 정도 내린다. 3,4월에는 2~3년마다 드물게 눈이 내린다. 겨울 기온은 -4℃이하로 내려가거나 14℃ 이상 오르는 일은 거의 없다.
여름은 보통 온화하고 종종 덥다. 도심지역은 열섬 현상으로 인해 다른 교외지역보다 5℃ 정도 온도가 높게 올라간다. 일 년에 7일 정도 30℃ 이상으로 기온이 올라가고 2일 정도는 기온이 32℃를 넘는다. 여름에 런던에서는 10일 중 이틀 정도 비가 오며 여름 평균 기온은 24℃이다.
2003년 8월에 런던의 큐 지역에서 38.1℃의 최고 기온을 기록했고, 1962년 7월에는 런던 노스홀트 지역에서 -16.1℃의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런던은 영국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다양한 지역이다. 런던은 전세계에서 뉴욕시 다음으로 이민자의 수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수도 빠르게 증가하여 신생아의 약 69%가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42]
2011년 인구조사 기준 영국 백인은 인구의 44.9%에 불과하며 인종별로 볼 때 백인이 59.8%, 아시아계가 20.9%, 흑인이 15.6%로 조사되었고,[43] 그레이터런던 인구의 36.7%는 해외에서 출생하였다.[44]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이민자 인구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 등 대영제국의 전 식민지 국가들로부터 오는 경향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폴란드인이나 여러 동유럽 출신 유럽인들도 돈벌이를 위해 런던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젊은이들도 그 목적으로 들어온다. 화교 커뮤니티도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외에 유학이나 업무, 영어학습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체류자들도 많은 편이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킹스턴어폰템스 뉴몰던과 그 주변에 많이 거주한다.
종교
2011년 인구조사 기준 런던은 기독교도의 인구가 48.4%로 조사되며, 이 밖에도 이민자들에 따라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여 무종교자 20.7%와 무응답자 8.5% 이외에 이슬람교 12.4%, 힌두교 5.0%, 유대교 1.8%, 시크교 1.8%, 불교 1.0%, 기타 0.6%로 드러났다.[45]
런던 기독교인들은 잉글랜드 성공회(Church of England), 개신교(감리교, 구세군, 침례교, 연합개혁&감리제 교회(United Reformed&Methodist,URC 등), 로마 가톨릭 등에 걸친 기독교인들이다. 한국교회에서는 흔히 영국 교회하면 이른바 '죽어가는 교회'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앙·인격·학문이 바탕이 된 공정한 선발과정, 엄격한 신학교육으로 검증된 성직자들과 지역 공동체에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는 기독교 정신이 있는 교회라는 것이 영국에 거주한 한국 기독교인의 평가이다.[46][47]
런던 지하철은 세계 도시의 지하철 중에서는 최초로 개통된 것이다. 런던 부근에는 6개의 공항(空港)이 있으며, 그 중 히스로 공항은 국제적인 주요 허브 공항이다. 센트럴 런던 지역으로 진입하는 차량에는 혼잡통행료가 부과된다.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에서는 해저터널을 통하여 프랑스와 벨기에로 갈 수 있는 유로스타를 이용할 수 있다.
런던의 문화산업은 도시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03년 통계에 따르면 런던 지역의 문화산업이 영국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하며,[48] 인구 천 명당 평균 25.6회의 행사를 누리는 것으로 조사됐다.[49] 런던은 세계 4대 패션 수도 중 하나로 꼽히며, 영화 산업 규모로는 세계 3위, 희극 공연 규모로는 세계 1위로 집계된다.[50] 극장 관람객 규모 역시 세계 1위에 달한다.[51]
런던의 대표적인 상권은 이즐링턴의 어퍼스트리트를 따라 에인절까지 이어지는 상권으로, 영국에서 술집과 식당이 가장 많이 밀집한 상권이기도 하다.[56]옥스퍼드 스트리트는 영국 최대의 상가로 그 길이만 1km에 달하며, 유럽에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상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여러 백화점과 판매점이 들어서 있는데, 영국의 대표적인 백화점 중 하나인 셀프리지스 본점도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위치해 있다.[57] 이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닌 해로즈 백화점도 남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1760년 창립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난감 가게로 꼽히는 햄리즈도 1881년부터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본점을 두고 있다.[58] 이밖에도 베이커 스트리트에는 1835년에 문을 연 마담 투소 밀랍인형 박물관이 있다.[59]
런던의 식문화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든 도시답게 그 면모도 다양하다. 이를 대표하는 런던의 먹거리 문화 지역으로는 방글라데시 요리 식당이 밀집한 브릭 레인, 중화요리 식당이 많은 차이나타운이 있다.[60] 런던 전역에서 중국 배달 음식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곳곳의 인도 요리 식당도 영국식 인도 요리라는 새로운 식문화에 기여하고 있다.[61]영국 요리의 대명사인 피시 앤드 칩스는 런던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1860년경 유대계 이민자였던 조셉 말린이 런던 동부의 보 지역에 최초의 피시 앤드 칩스 가게를 열었던 것이 전해져 내려온다.[62][63] 영국식 아침식사인 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빅토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런던의 요리로, 수많은 카페에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시간 제약 없이 취급 판매하고 있다.[64]미슐랭 가이드의 별 세 개 인증 레스토랑은 런던에만 총 다섯 곳이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첼시에 위치한 레스토랑 고든 램지이다.[65] 차문화의 경우, 런던 각지의 호텔에서 전통식 애프터눈 티 서비스를 제공하며, 피카딜리의 호텔 카페 로열의 오스카 와일드 라운지가 특히 유명하다. 그 밖에도 에거튼 하우스 호텔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테마로 한 애프터눈 티를, 코번트 가든의 원 올디치에서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테마로 한 애프터눈 티를 선보이고 있다.[66][67][68] 이 밖에도 영국에서 차에 적셔 먹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다이제비스킷인 맥비티즈도 1925년부터 런던 북서부의 할레스던에서 생산된다.[69]
런던의 연례 행사로는 1월 1일 런던 아이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 축제인 새해 퍼레이드 (New Year's Day Parade)부터, 매년 8월 말에 펼쳐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거리 축제인 노팅힐 카니발 (Notting Hill Carnival)이 있다. 전통 행사로는 11월의 로드 메이어스 쇼 (Lord Mayor's Show)가 있는데, 런던 시장경이 새로 임명되어 런던 거리를 행진하는 연례 행사가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6월에는 트루핑 더 컬러 (Trooping the Colour)라는 이름으로 영국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여 영국군과 영연방 국가 부대가 참여하는 군사 행진식이 열린다.[70] 또한 노팅힐 카니발 다음으로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거리 축제인 보이샤히 멜라 (Boishakhi Mela)는 방글라데시계 영국인들의 새해 맞이 축제로, 유럽에서 가장 큰 아시아인 축제이기도 하다.[71] 마지막으로 왕립원예학회에서 주관하는 첼시 플라워 쇼 (Chelsea Flower Show)는 매년 5월 닷새 동안 진행되는 런던의 꽃 축제다.[72]
런던은 영국의 수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어왔으며, 또 여러 작가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어왔다. 그 시작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런던 서더크의 타바드라는 여관에서 쓰인 소설이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일생의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냈으며, 그의 작품이 공연되던 글로브 극장은 오늘날 셰익스피어 글로브란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다. 동시대 작가인 벤 존슨 역시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몇 편 남긴 바 있다.[73]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17세기 소설가 대니얼 디포 역시 1665년 런던 대역병을 소설화한 〈전염병 연대기〉 (1722)를 남겼다.[73] 런던의 문학 중심지로는 전통적으로 햄프스테드가, 최근 들어서는 블룸스베리가 꼽힌다.
런던에는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런던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연구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 시작이자 중심은 단연 대영박물관으로,[85] 1753년 유물과 생물 표본의 보존, 국립 도서관의 목적으로 블룸스베리에 설립되었으나, 오늘날 전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700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는 영국 최대의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전근대 서양 회화를 전담하는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는 1824년 설립되었으며, 트라팔가 광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런던의 대표적인 미술관이다.[86]
런던의 사우스켄징턴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개발된 '앨버토폴리스'라는 과학·문화 전시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응용미술), 런던 자연사 박물관, 런던 과학 박물관의 세 국립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국립 초상화 박물관이 1856년에 설립되어 영국사의 유명인물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초상화 컬렉션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다.[92]영국 미술을 전담하는 국립미술관으로는 테이트 브리튼이 있는데, 1897년 내셔널 갤러리의 부속관으로 출발한 곳이다. 테이트 브리튼은 한동안 현대미술까지 다뤘으나, 2000년부터는 이들 현대미술 소장품을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개조해 건립한 테이트 모던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93]
↑Clarey, Christopher (2008년 5월 7일). “Traditional Final: It's Nadal and Federer”. 《The New York Times》. 2008년 7월 17일에 확인함. Federer said[:] 'I love playing with him, especially here at Wimbledon, the most prestigious tournament we have.'
↑Will Kaufman & Heidi Slettedahl Macpherson, 편집. (2005). 〈Tennis〉. 《Britain and the Americas》. 1 : Culture, Politics, and History. ABC-CLIO. 958쪽. ISBN978-1-85109-431-8. this first tennis championship, which later evolved into the Wimbledon Tournament ... continues as the world's most prestigious ev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