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황후 곽여왕(文德皇后 郭女王, 184년 ~ 235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魏)의 초대 세조 문황제(世祖 文皇帝) 조비(曹丕)의 황후이다. 후한 말의 남군태수(南郡太守) 곽영(郭永)의 딸로써, 안평군(安平郡) 광종현(廣宗縣) 태생이다.
생애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이후,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조조(曹操)가 위공(魏公)으로 책봉될 당시 동궁(東宮)의 궁녀가 되었으며, 조비(曹丕)가 후계자가 되도록 도왔다.
총애를 받아 곧 귀비(貴妃)가 되었다.
견씨(甄氏)가 죽은 뒤, 조비는 곽귀인을 황후로 세우려 하였다. 문무백관들의 반대를 받았지만, 조비는 이를 무릅쓰고 곽귀인을 황후로 세웠다. 곽귀인이 황후가 되자, 그녀의 일가 사람들이 관직에 출사하게 되었고, 곽귀인은 그들이 잘못된 일을 할 때마다 그것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였다.
조예(曹叡)가 황제에 즉위하자, 문덕황후는 황태후(皇太后)에 책봉되었으며, 영안궁(永安宮)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청룡(青龍) 3년(235년) 허창(許昌)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유언에 따라 수양릉(首陽陵)의 서쪽에 묻혔다.
기타
당대 사서인 《위략(魏略)》이나 후대 사서인 《한진춘추(漢晋春秋)》등에서, 견씨(甄氏)의 죽음이 곽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곽귀인은 조비에게 견씨를 중상 모략하여 조비가 견씨에게 자살을 명하게 유도한 뒤 황후가 되었으나,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견씨의 아들 조예(曹叡)가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다. 조예는 처음에는 문덕황후를 후대하여 황태후(皇太后)로 책봉하였으나, 견씨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진행한 뒤 문덕황후를 사사하였다. 《자치통감》 역시 견씨가 죽은 이유는 곽귀인이 견씨를 참소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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