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실 또는 조선 왕실은 조선의 왕실이자 그 후신인 대한제국의 황실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가로서 귀족 지위를 가졌다. 전주 이씨 가문의 태조 이성계가 세웠으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장남 순종이 후사가 없어 차남 의친왕계 후손들로 대한제국 황실이 어이지고 있다.
고종 광무 태황제 이희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그의 만년인 1912년에 측실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위 한일 병합 뒤 1925년에 도쿄의 학습원에 유학하여 1930년 일본 옛 쓰시마번 번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하여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정신 이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결혼후 더욱 악화되었다. 1955년 소(宗)씨 가문으로부터 이연당하고 1962년 귀국했다. 소 마사에는 와세다대학(이방자의 저서에서는 메이지대학이라고 되어있고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정보이다)을 졸업하고 일본인과 결혼했으나 그 후 실종되어 행방불명되었다.
광무황제와 황후 민씨(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남으로 187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대한제국 성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켜 광무황제가 퇴위당한 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융희황제(순종)로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혼인은 하였으나 자손이 없다. 한일 병합 늑약의 조인과 함께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실질적으로 잃고 그 지위에 상당하는 명시적 이왕(李王)의 칭호를 일왕인 히로히토로부터 받았다.
광무황제와 황귀비 엄씨(순헌황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영친왕 은(垠)은 1907년 융희효황제 즉위와 함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으나 어린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위 한일 병합과 함께 명시적 왕공족 이왕세자에 봉해졌다. 1917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제29기), 이듬해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노 모리마사 왕의 제1왕녀인 마사코(방자)와 결혼하였다. 융희황제 척이 붕어한 1926년에는 황실수장의 자리와 소위 이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왕 부부는 도쿄의 아카사카 저택(현재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에서 생활했다. 황태자 은은 실질적 일본 군인의 신분으로 우쓰노미야 연대장 등을 거쳐 종전시에는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패전 후 황태자 부부는 1947년 신분을 잃고 일본 국적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귀국을 한 것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인 1963년의 일이었다. 두사람 사이에는 장남 이진(생후 8개월 만에 급사), 차남 이구가 있다. 사후 의민태자(懿愍太子) 추존.
황태자 은의 차남 이구(李玖)는 1931년 12월 29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의민태자가 창덕궁 이왕의 작위를 받은 후 창덕궁 이왕세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전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미국에 귀화하였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였고 1982년에는 부인 줄리아와도 이혼하였다. 이혼 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독살로 인한 심장마비로 자신이 태어난 곳인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75세. 사후 회은세손(懷隱世孫) 추존.
이건(李鍵)은 의친왕 이강의 장남으로 고종의 장손자이다. 의친왕이 1930년에 강제 은거를 당하자 소위 공위를 세습 받아 ‘이건공 전하’로 불렸다.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대좌에 이르렀다. 1931년에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佳子)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에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하였다.
이우(李鍝)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 소위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로 불렸다. 사망 이후에 사시인 흥영군에 추봉되었다. 소위 일제강점기 조선경성부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좌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8월 6일에 일본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8월 7일에 사망하였다. 1945년8월 15일에 경성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흥원에 안장되었다.
이곤(李錕)는 의친왕 이강의 6남으로 큰 형 이건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둘째 형 이우부터 다섯째 형 이주까지 종친에게 양자로 출계함에 따라서 의친왕의 후계자가 되어 의친왕가의 종주가 되어 사동궁의 사자(嗣子, 상속자)가 되었다.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의 장례식에 상주로 제사를 지냈다. 운현궁영선군 이준용의 사후 양자로 입양된 흥영군 이우(李鍝)의 친동생이다. 6.25 전쟁 이후 생활고에 시달렸고, 1960년~1962년제2공화국장면 정부 때 국회도서관사서로 재직했다. 이후 1964년 국회의원 황호현의 천거로 국회사무처공무원으로 임용되어 1974년까지 재직하였다.
이준(李準)은 의친왕 가문의 종손이며 사동궁(寺洞宮, 의왕부(義王府))의 사손(嗣孫)이다. 의친왕가 종주 이곤의 장남으로 1961년9월 11일 서울에서 탄생하였다. 이준 황손은 칠궁(七宮, 現 청와대영빈관)과 덕수궁(德壽宮)에서 거주하던 중 친일 세력 및 제5공화국전두환 정권 초기의 퇴거 조치로 인하여,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現 영휘원(永徽園,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 재실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부모님과 홍릉 재실에서 거주하기도 하였고, 1998년에서 이듬해 1999년까지 희망의한국신당 중앙위원 직위를 거쳐 2000년에서 이듬해 2001년까지 자유민주연합 상임행정위원 직위 역임을 하였고 자민련 탈당 이후 외국계 전자회사에서 상무이사, 전임이사, 부이사장 직위를 거쳐 이사장으로 근무를 했었다. 1989년 4월 21일 종조모인 덕혜옹주가 자녀가 없이 별세하자 이준이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루었고, 며칠 뒤인 4월 30일 영친왕비 이방자(英親王妃 李方子)가 훙서하시자 당숙인 회은황태손 이구와 함께 장례를 치루었다. 2005년 당숙인 이구가 일본에서 갑자기 훙서(薨逝)하자, 현 황사손 이원(皇嗣孫 李源)과 함께 황사손(皇嗣孫)으로 거론이 되기도 하였고 황실 내부 상의 끝에 이준은 사동궁 사손으로서 의친왕가를 이어야 했기에, 사촌동생 이원이 영친왕계로 출계하여 황사손에 봉직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현재는 사동궁(寺洞宮, 의왕부(義王府))의 사손(嗣孫)으로써 의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5대 제향(조경단, 환구대제, 종묘대제, 사직대제, 건원릉제)과 의친왕 제향 및 각 능 제향에 활동하면서 황실의 전통문화 계승과 보전하는데 힘쓰고 있으며, 의친왕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연구, 보존, 전시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