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테레비방송망주식회사(일본어: 日本テレビ放送網株式会社, にほんテレビほうそうもうかぶしきがいしゃ, Nippon Television Network Corporation, NTV)는 1952년에 설립된 간토 광역권을 대상으로 방송하는 일본의 민영방송사이다. 일본의 민영방송사 중 최초로 설립되었다. 약칭은 니혼테레비(日本テレビ), 더 줄여서 닛테레(日テレ)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설
호출부호(콜사인)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JOAX-DTV(UHF25ch/리모콘ID4ch, 주파수545.142857 MHz/10 kW)
보유채널
관동광역권에 걸친 지상파 방송 이외에 이하의 채널을 방송, 공급하고 있다.
日テレG+(닛테레G+),
직영위성이용방송으로서 스카이페펙트TV!를 통해 방송하고있는 것 이외에도, 스카이퍼펙트TV!e2(동경 110도 CS방송)의 위탁방송사업자인 CS일본, 또한 일부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국에의 채널공급을 통새서 각 지역국에도 방송을 하고 있다.
日テレNEWS24(닛테레 뉴스24)
전국의 니혼TV 계열국과, 해외 거점에서 수집한 뉴스를 24시간 발신하고 있다.
스카파!(동경 110도 CS 방송), 스카이 퍼펙트TV!e2(동경 110도 CS 방송), 스카이 퍼펙트 TV! 프리미엄 서비스 히카리와 일부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각각 공급되고 있으며, 전국의 계열국과 BS 닛테레에서도 심야에 필러로 방송하고 있다.[1]
日テレプラス(닛테레 플러스)
과거의 명칭은「日テレプラス&サイエンス(닛테레 플러스&사이언스)」.
니테레플러스와 사이언스채널의 공용채널이면서 동시에 니테레플러스의 부분방송을 스카이퍼팩트TV!에서는 위탁방송사업자인 재팬이미지커뮤니케이션즈, 스카이퍼팩트TV!e2에서는 CS닛폰, 또 일부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각각 공급되고 있다.
지역 민방 네트워크
1966년 닛폰 뉴스 네트워크를 조직하였고 몇 년후에는 프로그램 네트워크 NNS를 조직해 지역 민방 네트워크 협정으로, 맺고 있으며 오키나와현[2]에 NNN계열방송국이 없기 때문에 보도취재지역에 간토지역 외에도 오키나와현이 포함된다.
호칭
개국이래 오랫동안 4채널(4チャンネル, 욘챤네루) NTV등의 약칭을 사용해오고 있으나, 1995년 전후반부터 캠패인을 통해 닛테레(日テレ)를 사용하기 시작함. 2000년12월에는 개국한 BS계열의 채널명을 BS닛테레(BS日テレ)로 하였다.
2003년 시오도메 이전을 계기로 회사의 로고를 日テレ로 하는 등 정식적인 명칭과 애칭으로 '日テレ'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신문, 텔레비전잡지의 방송편성표 표시는 종래 그대로 니혼 TV(日本テレビ)이지만 데일리스포츠 도쿄판과 방송영상의 배포에 있어서는 NTV를 표기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CX(후지 TV), EX(TV 아사히), TX(TV 도쿄)처럼 콜사인 끝자리인 AX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시부야에는 니혼TV가 투자한 '라이브 스페이스 SHIBUYA-AX(시부야 악쿠스)'가 있어 1990년대후반의 토요일 심야가 되면 AX(읽기는「アックス(악쿠스)」)라는 방송이 있었다.
참고로 러시아의'NTV텔레비전', 말레이시아의 'ntv7'과는 관계가 없다.
표기상의 회사명은 니혼이 아닌 닛폰이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며 이는 NHK의 경우도 같다.[3]
1959년4월 10일 황태자 아키히토(아키히토 천황) 결혼식 당일 39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대규모 생중계를 실시한다.그 후, 결혼 당일의 상황을 35mm 컬러 필름으로 촬영한 영상을 오후 9시부터 특별프로 「이 좋은 날」을 통해 컬러로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 방송중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CM도 방송되었다.
1972년12월 당시의 네트워크 가맹국 나고야 TV 방송(NBN)과 프로그램 편성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주쿄광역권 네트워크 방송국을 주쿄 TV 방송)(CTV)로 통일하기로 결정.(CTV 개국 이후에도 NBN이 중복가맹 했는데 이는 당시 CTV가 NET(현재의 TV 아사히)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2015년3월 31일 이날 정오를 기해 BS디지털 위성을 통해 송출하던 난시청지역용 지상파 동시방송을 중단.
2019년1월 29일 옛 코우치마치 본사 인근에 세워진 니혼TV 반쵸 스튜디오 가동 개시.
특징
정식회사명에 방송망 이 들어간 이유는 전국적인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쿄에 중앙방송국을 두고 오사카나 나고야등지에 니혼TV 계열의 지역방송국을 개설하여 중앙방송국과 지역방송국간에 독자적인 초단파 통신망을 설치하고 방송이외의 대역은 통신사업을 하여 방송사업과의 겸업과 통신사업의 민영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일본 우정성이 이러한 계획을 일축함으로써 통신사업에서 철수하게 되고 간토 광역권만을 대상으로 하는 민영 방송국이 되었다.
일본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를 독점중계하는 이유는 니혼TV의 대 주주인 요미우리신문 그룹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창단하였기 때문이다.
개국 당시 일본의 텔레비전 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광고 매체로서의 민영 텔레비전임을 어필하기 위해 수도권의 주요 장소에 가두 TV를 설치해 텔레비전 보급률 증진에 유용하게 이용했으며 또한 코우지마치에 있는 사옥옆의 텔레비전탑을 전망 목적으로 일반에 공개하면서 이곳은 도쿄 타워가 생기기 전까지 관광 명소로 사랑받았다.
너무 요미우리 신문 색깔을 띄어서였는지 초기에는 가맹국이 모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도쿄 방송보다 네트워크 구성이 늦어져 보도 프로그램의 질적저하가 일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일어난 프로그램 판매실적 저하, 그리고 당시 사장이었던 쇼리키 마쓰타로가 도쿄타워를 통한 방송송신을 거부하면서 생긴 난시청문제로 인해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잠시 침체된 적이 있었다.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국중에서 새로운 매체를 빨리 방송에 적용시키는 방송국으로 유명하다.
1973년4월 10일부터 1973년9월 30일까지 도라에몽을 방영하였고 시청률도 좋은 편이었으나 제작사 문제로 조기종영되었고 후에 그 회사는 도산하였으며, 당시 방영된 도라에몽은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상이 현재 공개되지 않고 있거나 소실되었다.
1980년대에는 당시 유행이던 로봇 애니메이션들을 많이 방영했지만 1990년이후로는 더 이상 로봇 애니메이션들을 방영하지 않는다.
1989년 오키나와에 2개의 민영방송국 주파수가 할당되자 난세이 방송(南西放送)이라는 회사를 세워 오키나와에 닛폰TV 계열국을 세우려 했으나 버블경기 침체로 인한 투자심리 위축이 원인이 되어 진출계획이 취소되었다.
↑현재 필러를 흐르고 있는 곳은 니혼TV를 비롯해서, 삿포로 TV 방송(원래 삿포로 본국에서만 방송했으나, 2004년 8월에 도내 전역으로 확대.), 아오모리 방송, TV 이와테, 미야기 TV 방송, 아키타 방송(도중에 중단됐지만, 후에 재개.),야마가타 방송, 후쿠시마 중앙 TV, 야마나시 방송, TV 니가타, 시즈오카 다이이치 TV, 쥬쿄 TV 방송, TV 가나자와, 후쿠이 방송, 요미우리 TV, 히로시마 TV, 니혼카이 TV, 야마구치 방송, 시코쿠 방송, 난카이 방송, 고치 방송, 후쿠오카 방송, 쿠마모토 현민 TV, 가고시마 요미우리 TV 등 24국.
↑오키나와 TV 방송에서 1990년에 발간한 오키나와 TV 30년의 걸음이라는 책에 따르면 원래 오키나와 TV 방송 초대 사장이 후지TV와 지역 민방 네트워크 협정을 맺기 전 니혼TV에 지역 민방 네트워크 협정 체결을 했으나 니혼TV측이「시기 상조」라면서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NTV의 아나운서도 '니혼테레비'라고 읽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방송개시-폐막 영상인 '비둘기의 휴일(原題:鳩の休日<하토노 큐지츠>)[1]'을 방송할 때 방송국명을 읽는경우 '니혼테레비'로 통일되어 있다.
↑1965년, NTV는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형식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그 프로그램이 일본방송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게 되면 성인프로그램의 대표주자로 나오고 있는 11PM이다. 하지만, 제작초기의 11PM은 거의 시사프로그램의 모습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11PM의 시청률은 기를 써도 안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NTV는 오오하시 쿄센(大橋 巨泉)이라는 유명한 사회자에게 출연의뢰를 했는데 그는 '이래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면서 11PM의 컨셉을 시사프로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으로 바꾸고 이에 따라 성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1991년까지 이어진 11PM의 이미지가 형성되게 된다. 그리고 11PM의 또다른 특징은 화요일,목요일에 요미우리 TV 방송, 토요일에 츄교TV(한시적,1973년 이전에는 나고야 TV 방송)에서 11PM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는 NTV노동조합이 11PM을 만들 당시에 11PM의 제작을 자기들을 더 혹사시키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당시 NTV는 노사관계가 안 좋았다고 한다.) 방송을 안 만들려고 하자 NTV측에서 화요일과 목요일에 요미우리 TV에 위탁해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해서 간신히 11PM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1PM이 언제나 잘나갔다는 것은 아니다. 11PM이 프로그램의 노선을 바꾼지 얼마 안되었을 때 버니걸 복장을 한 여성 리포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본 PTA에서 청소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하여 제재를 가하는 일도 있었고, 1975년에는 그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인 미야모토 겐지 씨가 '11PM은 포르노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방송에 적절하지 않은 화면이 방송될 때도 있었다.
이런 일 때문에 11PM의 스탭들은 경찰에 출두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들은 경찰서에 나갈 때마다 싸우러 간다는 생각을 하고 경찰서로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