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3]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수광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서자로 효빈김씨(孝嬪金氏) 소생 경녕군 이비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모양군 직이고, 증조부는 선사군이며 증조부 선사군은 할아버지 하동군 이유와 양 할아버지 신당군 이정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신당군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하동군의 아들들 중 한사람인 이희검이 신당군의 양자가 되었다.
왕족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의 외증손이기도 했다. 류관은 정승의 신분임에도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희검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
어려서 한성부동대문 근처에 살았고 17세에 아버지 이희검을 여의었다. 그는 붕당에 거리를 두고 당색에는 초연하였으나 후일 그의 제자들과 그의 아들 이민구의 제자들은 대체로 남인과 북인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에서 패하였다.[4]
그 뒤 경상우도방어사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박진(朴晉)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
박진(朴晉)이 밀양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6]
”
그 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해 의주로 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파천한 조정을 따라 활동하며 1593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등 삼사의 언관직을 거쳐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을 역임했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7]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만났고,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기록했다.[8]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9]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 3년)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신부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유변(劉汴)의《속이담(續耳譚)》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언제?]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10] (→조선의 대외 관계) 귀국 후에는 대사간·대사헌 등의 언관직(言官職)과 지방 행정직을 맡았다.[4]
1613년 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11]: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4]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4]
본래 총민강기(聰敏强記)하여 기억력이 뛰어났던 이수광은 그 때 중국에 들어가서 주자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 체계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고,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처음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12] 이수광의 철학적 특성은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어서,[1]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3]
또한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제 소임을 못하고 권신, 재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질타, 탐관오리를 탄핵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은 남달리 청빈해야 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