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은열공파로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겸 태자태사 강민첨의 후손이다.숙종 39년 윤5월 21일에 아버지 문안공 현이 64세 때, 그는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여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3]1773년음서로써 하급 문관 관료에 천거된 그는 1776년 기로정시에 갑과 1등으로 급제하고, 기로소[4]에서 뽑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 천추 부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정도로 서화에 뛰어났다. 글씨는 전서·예서를 비롯한 각 체에 모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그의 화풍은 정선을 계승한 것으로 담담하면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다. 그는 당시 화단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후원자 또는 추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으며 그림으로 『난죽도』, 『산수도』, 『영통동구도』 등이 있다.
화가이자 평론가로서의 업적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하면서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사람의 그림에 평을 썼다. 당시 화단에서 남종문인화, 진경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화가 유행한 것이나 서양화법의 수용이 이루어진 것에는, 강세황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 더욱이 그는 김홍도와 신위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5]
↑강세황은 71세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게 된다. 기로사는 나이가 많고 지위도 있는 사대부만이 들어가는 곳으로, 강세황의 가문은 강세황의 할아버지, 아버지, 강세황을 포함하여 삼대가 기로사에 들어간 장수 집안이다. 변영섭 (1995). 《1월의 문화인물 미술인 강세황》. 문화체육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