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義禁府)는 고려와 조선의 수사기관이다. 별칭은 금오(金吾) 또는 왕부(王府)다.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했다.
역사
고려 충렬왕 때 설치된 순마소가 그 시초이다. 조선 초에 고려제도를 따라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설치, 형조가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대하여 순군은 순작(巡綽)·포도(捕盜)·금란(禁亂), 즉 경찰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사법기능 뿐 아니라 반란 진압의 기능도 담당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법기능만 전담하게 되었다. 1394년(태조 3)에는 이미 형조·사헌부와 협동하여 박위(朴威)의 불경죄(不敬罪)를 처결하였으며, 정종 때에는 형조의 체수(滯囚)를 처결하는 등, 점차로 형옥(形獄)을 다스리는 일을 겸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보면 양반 관료 또는 외국인의 범죄, 역모죄, 유교 사상에 어긋나는 일 등 중대한 범죄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였다. 1402년(태종 2) 순군만호부를 고쳐 순위부(巡衛府)로 하고 이듬해 의용군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 병조(兵曹)에 소속하게 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르러 의금부로 개편, 제조(提調) 1인, 진무(鎭撫) 2인, 부진무(副鎭撫) 2인, 지사(知事) 2인, 도사(都事) 4인, 기타의 관속을 두었는데, 《경국대전》에는 동반(東班)의 종1품아문으로 소관 사무는 왕명을 받아 추국(推鞫)하는 일이었으며, 판사(判事 : 종1품)·지사(知事 : 정2품)·동지사(同知事 : 종2품)의 당상관을 합쳐 4인을 두되 다른 관원으로 하여금 겸임케 하고 경력(經歷 : 종4품)·도사(都事 : 종5품)을 합하여 10인, 그 이외에 나장(羅將) 232인을 배치하였다. 《속대전》에서는 경력을 없애고 당하관(堂下官)은 도사만으로 하되 참상(參上 : 종6품)·참하(參下 : 종9품) 각 5인, 나장 40인, 《육전조례》에서는 나장 80인, 군사(軍士) 12인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에 비하여 나장의 수가 줄어든 것은 의금부의 직무가 경찰보다 재판으로 기울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며, 관리·양반·강상(綱常)에 관한 범죄를 취급하는 특별재판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금부의 소속 관청인 당직청에는 신문고를 두고 교대로 낭청(郎廳) 1명이 번(蕃)을 들어 사서(士庶)의 고첩(告牒)과 원억(寃抑)의 신소(申訴)를 받아들였는데 연산군 때에는 공포정치의 집행본부가 되었고, 1505년(연산군 11) 밀위청(密威廳)으로 개칭되었다. 중종 반정 후 본 이름으로 환원하였으나 어느 틈엔가 신문고가 없어지고 당직청의 특별한 의의도 상실되고 말았다.
1894년(고종 31) 7월 의금부를 의금사(義禁司)로 개칭, 법무아문(法無衙門)에 속하게 하고 대소관원의 범공죄(犯公罪)를 다스리게 하다가 12월에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無我門權設裁判所)로 개칭, 지방의 것을 제외한 모든 재판을 담당케 하여 각 관청의 재판·용형(用刑)을 금지하였다. 이듬해 3월의 재판소구성법 제정에 따라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로 변경되었고, 1899년 재판소구성법이 개정됨에 따라 평리원(平理院)으로 개편되었다. 평리원에서 대심원으로 개편되었다가, 이후 조선총독부는 에 의해 통감부 고등법원에서 의금부의 재판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통감부 휘하 정보기관이 의금부의 정보, 경찰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1][2]
청사
의금부 청사는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에 보신각 건물과 대각선으로 마주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경지략》에서는 의금부 본부가 한성부 중부 견평방 의금부내계에 있었으며, 당직청은 창덕궁 금호문 밖에 있었다 전한다.[3]
청사는 중심부에 대청이 있는 본부건물이 있었다. 본부건물은 남쪽으로 돌출된 호두각(虎頭閣)이 있었고, 좌우로는 당상관과 도사들이 근무하는 아방(兒房)과 낭청방(廊廳房)이 있었다. 호두각은 죄인을 심문하는 장소였는데, 숙종과 영조도 여기서 죄인을 심문했다. 호두각 주변으로는 삼면에 걸쳐 옥사를 두었고, 서쪽편에는 종교시설인 부군당을 두었다. 북쪽에는 연정을 두어 하절기에 휴식공간으로 사용했고, 남쪽에는 당상관만이 출입할 수 있는 3칸의 정문이 있었다. 정문의 중앙으로는 판사가, 동쪽 칸은 지사가, 서쪽 칸은 동지사가 출입했다. 정문 밖에는 대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는 망문(望門)이 있었다. 망문의 서쪽 협문은 낭청 및 선생을 거쳤던 자가 출입하는데 선생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었다. 망문의 동쪽 협문은 죄인이 출입했다.[4]
현재 주소 체계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100번지이며, SC제일은행이 입점한 건물이다.
관직
의금부의 구성은 법전의 개정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였다. 크게 《경국대전》 시행, 《속대전》 시행을 기준으로 나눈다.
↑의금부 기능의 대한제국 이후 변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때는 총독부 휘하 법원이 의금부 재판기능을 담당하고, 총독부 휘하 정보기관이 의금부의 정보수집 기능을 담당하게 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정부의 법원이 의금부의 재판기능을 담당하게 되었고 교통부 휘하의 교통국과 내무부 휘하의 연통제가 의금부의 정보수집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경찰 사찰과로 정보수집 권한이 이양되었다. 그랬다가 현재 의금부의 정보수집 기능은 군사정권 때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다시 이어받았고, 현재의 국가정보원이 의금부의 정보수집 기능을 이어받았다. 재판 기능은 대한민국의 법원이나 군사정권의 군법회의와 현재의 군사재판소로 권한이 이관되었다. 그 외의 의금부의 군사 정보 기능은 광복 후에 미군정 육군 정보기관에 권한이 이양되었다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육군 특무대와 군사정권 초반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육군 방첩대가 이어받았고,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거친 박정희 정권 당시의 육군보안사령부를 거쳐,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와 전두환 정권 시절의 국군보안사령부를 거쳐, 민주화 이후 문재인 정권 초반기까지의 국군기무사령부를 거친 뒤에, 문재인 정권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거치고 윤석열 정권의 국군방첩사령부가 의금부의 군사정보기능을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