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이 된 해에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고(무고의 난), 여태자의 병력은 승상부에까지 다다랐다. 유굴리는 단신으로 도망쳤으나 승상의 인수를 잃어버렸고, 태자의 반란을 공표하지 못한 채 파발을 통해 감천궁에 있었던 무제에게 이를 알렸다. 무제는 장안의 성문을 걸어잠그고 반란군을 포위하여 물리칠 것을 명하였고, 유굴리는 진압군을 지휘하였다. 닷새에 걸친 싸움에 수만 명이 죽었으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여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화 3년(기원전 90년), 유굴리의 사돈인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3]가 칙명을 받들어 흉노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출진하기 전에 이광리는 유굴리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의 소생인 창읍왕이 황태자가 되게끔 손을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유굴리 또한 내심 원하고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